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11, 초판12쇄).
김사인 시인은 오랫동안 『현대문학』 '누군가의 시 한 편'에서 시를 소개했습니다. 책이 오면 얼른 이 시인이 소개하는 시부터 읽었습니다. 그 시들을 이 블로그에도 여러 번 옮겼습니다.
이 시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샀는데, 아직 이 시 「풍경의 깊이」만 읽고 다른 시는 단 한 편도 읽지 못했습니다. 이 시집을 언제 다 읽을 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도 합니다. 호머처럼 일생을 詩만 쓰다가 가는 걸출한 인물은커녕, 세상에 시 한 편 남기지 못하는 저같은 사람은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일생동안 좋은 시만 읽다가 갈 수 있다면 '팔자 좋은' 베짱이 신세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시를 읽었을 때 두 시인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먼저, 박재삼 시인의 「천지무획」입니다.
천지무획(天地無劃)
박재삼(1933~1997)
나를 하염없이 눈물나게 하는, 풀잎 촉트는 것, 햇병아리 뜰에 노는 것, 아지랑이 하늘 오르는 그런 것들은 호리(毫釐)*만치도 저승을 생각하랴. 그리고 이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주 이들을 눈물나게 사랑하는 나를 문득 저승에 보내 버리기야 하랴.
그렇다면 이 연연(戀戀)한 상관(相關)은 어느 훗날, 가사(假使) 일러 도도(滔滔)한 강물의, 눈물겨운 햇빛에 반짝이는 사실이 되어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얼마 동안은 내 뼈 녹은 목숨 한 조각이, 얼마 동안은 이들의 변모한 목숨 한 조각이, 반짝인다 하여도 좋다. 혹은 나와 이들이 다 함께 반짝인다 하여도 좋다.
그리하여 머언 먼 훗날엔 그러한 반짝이는 사실을 훨씬 넘어선 높은 하늘의, 땅기운 아득한 그런 데서 나와 이들의 기막힌 분신(分身)이, 또는 변모(變貌)가 용하게 함께 되어 이루어진, 구름으로 흐른다 하여도 좋을 일이 아닌가.
호리(毫釐) : 매우 적은 분량을 비유(인용자 註)
교장을 할 때 이 詩를 출입문 옆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풍경의 깊이」를 읽자 이 시가 생각났고, 박재삼 시인의 여러 시들이 그리워졌습니다.
♬
다음은 김원길 시인의 「공작수(孔雀愁)」입니다.
공작수(孔雀愁)
그대 인도 옛 왕조의 어느 호사하던 왕,
머리에 조촐한 화관을 이고
깃털의 송이송이 들꽃 다발을
누구를 송축하여 이따금 펼쳐 보이나.
칠보(七寶)의 구중궁(九重宮)
무녀(舞女)의 나른한 팔에 감기어
환락이 천국마냥 지겹던 사내
전쟁과 패륜으로 지루를 달래던 왕,
잡아 온 토인 미녀의
몸을 탐내다가
마음을 빼앗기고
눈물 배워 마침내
착하고 겁 많은 임금으로 살다가
그녀 죽자 그대 또한 슬픔으로 숨져
온몸에 비애의 푸른 멍을 띠고
이승에 한 마리 공작으로 태어난
그대 인도 옛 왕조의 눈물 많던 왕,
깃털엔
수백 수천의 호동그란 눈을 쳐들고
누굴 찾아 이따금 사위(四圍)를 살피나.
김원길 시집 『들꽃다발』(길안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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