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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악에 바친 노인들

by 답설재 2012. 1. 9.

 

 

 

 

 

열차 안의 저 좌석을 '경로석'이라고 부르면 섭섭해할 노인이 많을 것입니다. 정작 그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노인만도 아닌데 명목으로는 '경로석'이라고 하며 생색을 내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분명히 '장애인·노약자·임산부·영유아 동반자 <공동>의 좌석'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일까요? 연전(年前)에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심사하듯 훑어보고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왜 이 자리에 앉았느냐?"고 따지는 제법 호기로운 노인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 노인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노인들도 슬슬 서로 눈치나 보며 앉아 있고, 새파랗게 젊은 놈은커녕 새파란 새댁이 떡 하니 앉아 있어도 그걸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노인들도 이제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봤자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격으로는 장애인 다음이라는 걸 알아차렸을까요?

 

따지고 들면 장애인이나 임산부나 영유아 동반자들도 할 말이 많은 것이 이 좌석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섭섭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

 

 

노인들 이야기를 하게 되면, 좀 거칠고 험하게 표현하여 '악만 남은 노인들'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지경입니다.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를 타보면 그야말로 '혈투'가 벌어집니다. 노인들끼리라고 서로 사정을 봐주거나 하지도 않고 더 늙어버린 연장자를 안타까워하는 이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장애인은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또 다칠까봐 우루루 몰려드는 노인들 무리에 가까이 가지도 않습니다. 다들 타고 내려간 다음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면 그때 조용히 타려고 아예 멀찌감치 서서 그 꼴을 구경이나 합니다. 

 

"왜 아침부터 밀고 지랄이야!"

 

그런 악다구니가 들리는가 하면, 먼저 탄 노인들은 저 안쪽에 턱 버티고 서서 지켜보다가 "만원(滿員)" 표시등이 켜지는데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당장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듯 합니다.

 

"내려요! 만원이잖아요!"

 

"조금만 기다렸다 타면 될 텐데, 그새를 못 참고!"

 

그럴 때의 그 노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에게는 평생 그 엘리베이터 나중에 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코 그런 구차한 입장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은 사람들 같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노인은 어쩌다가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한번 그 엘리베이터를 타보십시오. 그런 노인이 어디 한둘인가. 제 눈에는 점잖게 있는 노인이 오히려 드문 것으로 보이니까 집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노인도 노인들끼리 모이는 그런 장소에서는 악다구니를 늘어놓고 비수를 들이대는 여느 노인이 되는 거나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거나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선진국이 되어가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저 후진국이었던 옛날의 그 그리운 우리나라를 찾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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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에 경로석 없는 나라 있죠~^^

  다리 힘 약하신 어르신들 서서 운동 되라는 의미로.

  버스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가볍게 손잡이 잡고 서 있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어느 블로그에서 발견한 댓글입니다. 저 엘리베이터 안의 노인들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하기야 요즘 노인들은 운동도 열심히 합니다. 남들이 요양원으로 실려가는 걸 보면서도 내 자식은 결코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고, 밥 잘 먹고 팔다리 성할 때는 효성을 다할 것 같은 자식들이라도 일단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게 되면 답답한 신세가 된다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어디 예를 들어 수영장 같은 곳에 한번 가보십시오. 노인들의 각축전은 거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원권 받으려고 줄을 서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동네 앞길에 나가봐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핫둘! 핫둘!" 걷기에 여념이 없는 노인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노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거나 아닌가 싶을 지경입니다. '젊은것들이 건강을 챙겨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나설 수밖에!'

 

그런 느낌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연초에는 새해 인사로 "건강하십시오!" 하면 '수구꼴통' 구세대이고, 신세대는 "복 많이 받으세요!" 한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쓸데없이(!) 오래만 살면 뭐 하느냐는 뜻일까요?

이런 이야기들은 어쩌면 세태를 너무나도 잘 반영하는 것 같아서 이야기를 들은 순간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자마자 '가만 있어 봐. 세상이 정말 그렇게 변한 건 아닐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내 딸이 그렇게 하면 잘 배운 똑똑한 여성이어서 그렇고, 며느리가 그렇게 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집안에서 성장한 탓"이라는 말, 그런 말들은 인터넷의 유머 소재가 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닌 쓰레기 정보들의 한 가지이지만 어쩌면 세태를 그리도 잘 반영한 것입니까. "건강하십시오!" 하면 수구꼴통 구세대라는 말도 혹 세태를 그처럼 잘 반영하는 유머 소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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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예사란 멋진 인디언이 쓴 아름다운 책 『인디언의 영혼』(오히예사·류시화 옮김, 오래된미래, 2004)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디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바로 그러했다. 날마다 생생하고 거칠 것 없는 삶이 내 앞에 펼쳐졌다.

우리 인디언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있어서 매우 탁월했으며, 대지와 가장 가까운 학생들이었다. 얼굴 흰 사람들이 책을 가지고 공부하듯이 인디언 아이는 동물들의 행동 습관을 관찰하며 배움을 얻었다. 또한 부족의 어른들을 지켜봄으로써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배웠다.(26)

 

그 오히예사는, 그 '못난' 인디언들은 부족의 어른들을 지켜봄으로써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배웠답니다. '못난 인디언들'…… 그러나 저 같으면 선진국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 '못난 인디언'이 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 블로그의 책 소개(2009.10.21)에서 저는 이미 그 책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내가 물었다.

"왜 어떤 뿌리는 약초로 쓰고, 어떤 건 쓰지 않는 거죠?"

할머니가 특유의 빠른 말투로 대답하셨다.

"왜냐하면 '위대한 신비'(인디언들이 절대적 존재인 신을 가리킬 때 쓰는 말. '위대한 정령'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께서는 우리가 무엇이든 쉽게 찾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지. 그렇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치료사가 되겠다고 나설 테니까. 불쌍한 막내야, 넌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많은 비밀이 있지만, '위대한 신비'께서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그 비밀을 열어 보이신다. 금식 수행을 하면서 홀로 ‘위대한 신비’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분이 보내는 신호를 받을 수 있지."(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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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손주들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새로 태어난 아기들에게도 대단한 사랑을 느낀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특이하게 긴 인간의 수명은 해명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부족(部族) 노인들'이 존재하는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문자가 없는 어느 부족사회이든 누군가가 지식의 창고로서의 역할을 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책이나 문자기록이 나오기 전에는, 각 부족의 노인들이 '부족 도서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부족의 전설과 신화, 부족의 역사 그리고 특별한 기술 등을 유지하고 전수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래 살 필요는 없지만 부족마다 적어도 몇 명의 현명한 노인들이 살아남는 것이 문화적 지속성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데즈먼드 모리스가 『머리 기른 원숭이 - 인간에 관한 개인적 시각』이라는 책에 쓴 이야기입니다.(황현숙 옮김, 까치, 1996,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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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 지식쯤이야 인터넷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늘려 있습니까? 심지어 구세대들이 보는 책이나 신문, 조금 더 나아가면 요즘은 할아버지들이나 하고 앉아 있는 블로그 같은 것들에도 그따위 지식은 얼마든지 들어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용도는 거의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그 논리는 아주 간단하군요.  아하!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심사가 저렇게나 뒤틀려 있군요.

 

그러면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저로서도 굳이 다 집어치우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구식으로 배우자는 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할 일이 없어져버린 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냥 흘러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뭘 좀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