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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by 답설재 2011. 12. 28.

어떤 선생님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1박2일 코스의 이튿날에 가봤더니 이미 몇십 명은 집에 가고 육십여 명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는 건 누구나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디에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해줄 준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그 자료입니다.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나는 오늘 기이한 내용이나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이야기가 제 뜻대로 되면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를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평소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치면서 ‘내가 이걸 왜 가르치려 하는가?’를 꼭꼭 생각합니까?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그건 잘못된 일 아닐까요? 우리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전에 ‘나는 무엇을 가르치겠다!’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겠다!’는 강한 의지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확신이나 의지가 불필요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게 무슨 교육입니까?

 

      ■ 이 기사가 거짓인가?

 

이 원고를 준비하려는데 이런 신문기사가 보였습니다. “원샷으로 결판나는 한국사회”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연말 특집에서 우리의 대학수학능력고사 풍경에 대해 무슨 로또 당첨을 노리는 경향을 패러디하는 것처럼, 혹은 폭탄주를 돌리고 즐겨 마시는 사람들을 패러디하듯 '한방 사회(Exam in South Korea : The one-shot society)'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 학구열과 근면성으로 번영을 이룩해냈던 한국의 시스템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나라 중 하나인 한국은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일 하루 동안만큼은 모든 것이 멈춰서는 나라다. 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평생 직업을 보장하는 일류대학에 들어갈 수 있지만, 낮은 성적을 받으면 수준이 낮은 대학에 가거나 아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

- 한국의 일그러진 교육풍토는 학생과 학부모를 성적의 노예로 만들고,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로 인생을 결정짓는다.

- 그러다보니 고등학교는 지옥이다.

- 한국에서는 모두가 대학에 가다보니 25∼34세 가운데 대졸자가 63%에 이르고 서울의 경우 가구소득의 16%를 사교육에 지출하지만 날이 갈수록 대졸 취업률은 낮아지고 있다.

- 과거에는 극성스러운 학구열이 경제부흥의 토대가 됐지만 이제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짓누르는 바람에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하는

한국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 치열한 경쟁사회와 치솟는 교육비로 인한 육아부담 때문에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해 인구 노령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오로지 대학진학에만 매달린다면 ‘기적의 나라’로서 명성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

- 이제 부자나라가 된 한국은 더 이상 다른 국가들을 모방해서는 고속성장을 이룰 수는 없다. 기적의 나라 한국은 긴장을 풀고, 한방이 아닌 다양한 성공 방식을 허용해야 한다.

 

 

  이코노미스트의 비판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엉터리 기사라고 항의할 수 있습니까? 외국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으레 그렇게 비판하는 것입니까? 혹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순위에 들지도 못한 영국이 각 영역에서 상위권을 휩쓴 우리나라를 비방하기 위한 수작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도 이미 생각하고 있겠지만 ‘원샷’이니 ‘결판’이니 하며 ‘막돼먹은’ 이런 기사를 쓰는 측에 항의할 것이 아니라, 이런 비판에 ‘무신경’이 되어버린 우리들 자신이 문제일 것입니다.

   

  ■ 목표가 미흡한가?

   

  도대체 우리는 어디가 잘못 되어 있는 것입니까? 교육과정 기준에서 이미 교육을 그 모양으로 하자고 한 것입니까? 다음은 2009 개정 교육과정 고시(2009.12.17)에 즈음한 교육과학기술부 보도자료의 일부입니다. 참 좋은 방향, 목표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밑줄을 쳐보려고 하다가 하나같이 모두 좋은 내용이어서 그냥 옮겼습니다.

 

 

□ 개정방향은 ‘하고 싶은 공부, 즐거운 학교’가 될 수 있도록

 

○ 학생의 지나친 학습부담은 감축하고,

○ 학생들의 학습흥미를 유발하며,

○ 단편적 지식·이해 교육이 아닌, 학습하는 능력을 기르고,

○ 지나친 암기중심 교육에서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창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으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 주요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과군 학년군 도입을 통한 집중이수제로 학기당 이수과목을 10~13 → 8과목 이하로 축소

- (초·중학교) 통합 운영 가능한 교과(도덕, 음악, 미술, 실과 등)는 특정 학기, 학년에 집중이수

- (고등학교) 1년 동안 두 개 학기에 나누어 배우던 것을 한 학기에 집중해서 학습(예 : 1학기 도덕(1단위), 2학기 도덕(1단위)

→ 1학기 도덕(2단위))

- 수업의 비효율성을 해소하고 토론, 실험 중심으로 수업 혁신 유도

○ 둘째, 창의적 체험활동을 강화하여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창의 인재 양성 교육을 학교에서 실시

- 특별활동과 창의적 재량활동을 통합하여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운영

- 창의적 체험활동은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활동 중심으로 배려와 나눔의 실천 활동을 주로 함

- 학생들의 도덕성 함양, 준법정신 및 윤리의식 강화를 위해서 기존의 교과 중심 교육에서 체험중심의 교육으로 전환

 

○ 셋째, 고등학교 단계에서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핵심역량을 키우기 위한 기초교육은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이수하도록 하는 한편,

나머지 교과에 대해서는 개별 학생의 흥미, 적성에 따라 필요한 과목을 선택·집중해서 깊이 있게 학습

- 기초영역(국어, 영어, 수학) 교과활동 강화

- 탐구영역(사회, 과학)의 교육은 기존의 지식전달 위주의 획일적 수업을 지양하고, 다양한 수업방법을 적용하는 등 수행능력 강조

- 체육ㆍ예술, 생활ㆍ교양영역의 내실화를 통한 소양교육 강화

- 지나치게 세분화된 교과목을 통합하고, 수준별로 편성하여 학생의 흥미와 수준을 고려한 수업이 가능하게 함

○ 넷째, 모든 학교에서 똑같은 교육과정을 획일적으로 교육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모든 학교가 특성화된 교육과정을 운영

- 국가는 교육과정 운영의 기본 틀만을 제시함으로써, 학교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

- 교과군별 기준시수의 20% 증감 운영이 가능하고, 교과군 내 교과별 시수는 단위학교가 결정

- 고등학교에서는 국가수준의 공통필수 과목을 지정하지 않고, 교과(군)별 필수이수단위 수만을 지정함으로써 학교에서 학생수준 및 진로 등을 고려한 학습기회 제공

 

 

  우리는 지금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적용으로 ‘하고 싶은 공부, 즐거운 학교’가 되게 한다는 저 개정방향에 동의하여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왜 그 지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교과군, 학년군, 집중이수제를 도입한 것은 수업의 비효율성을 해소하고 토론, 실험 중심으로 혁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수업이 그렇게 바뀌고 있습니까?

  특별활동과 창의적 재량활동을 통합하여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운영함으로써 기존의 교과 중심 교육이 체험중심교육으로 전환되고 있고, 학생들의 도덕성 함양, 준법정신 및 윤리의식이 강화되고 있습니까?

  고등학교에서는 기초영역(국어, 영어, 수학) 교과활동이 강화되고 있고, 탐구영역(사회, 과학)의 교육은 종전의 지식전달 위주의 획일적 수업을 지양하고 다양한 수업방법을 적용하는 등 수행능력이 강조되고 있으며, 체육ㆍ예술, 생활ㆍ교양영역의 내실화를 통한 소양교육이 강화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 교육에서 무엇보다 앞세워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한다면 왜 교육과정 적용 초기부터 그 목표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 좋은 것이 분명하다면 왜 실천하지 않고 있는가?

   

  보도자료의 저 의도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번에도 그렇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책임질 일입니까? 정부에서는 “이렇게 정해 놓았으니까 현장에서 잘 실천하면 된다”고 할 것입니다. 현장의 여러분은 어떤 설명, 혹은 어떤 변명을 하겠습니까?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보여주겠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 블로그 Idea factory(2011.1.20) 중에서 “안전한 학교, 즐거운 수업을 기대하세요!”라는 파일의 일부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 담당관은 으레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버리고 검토해보았으면 합니다.

 

 

Q 1. 학습량의 20%를 경감시키고 그 20%를 학교가 자율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자율편성권 확대가 국·영·수 등 입시에 관련된 과목을 집중 편성하는 방식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많습니다. 이는 의무적인 것인지 그리고 과연 취지에 맞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1. 사실 20%를 줄이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교과 학습량 자체를 20%로 줄이는 것과 수업 시수를 학교 여건에 맞도록 자율적으로 20% 조정하는 거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물리적인 양이 줄어든다고 해서 학습의 깊이 또한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학습량을 감축함으로써 불필요한 부분을 줄이고 그 시간에 실험과 탐구를 함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가르치겠다는 거죠. '적게 가르치고 깊이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습량과 시수를 줄이는 게 의무적인 건 아니고 학교에 따라 자율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게 자율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는 게 학교 급별∙지역∙학생들의 발달단계에 따라서 가르칠 내용이나 교육 과정을 달리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학력향상 중점학교라면 국·영·수와 같은 수업이 많이 필요할 수 있고 반대로 예술 중점 학교라면 국·영·수보다는 학생들의 특기를 기르기 위한 수업 시수가 더 있어야 하는 게 옳겠죠. 그래서 국가수준∙시도수준∙단위학교의 목표나 성취기준은 분명히 하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은 학교 여건과 학생 기질에 맞도록 다양하게 조절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Q 2. 수업이 이론 요약 중심에서 현장 실생활 중심 및 토론과 실습 위주로 가다 보면 무엇보다 소통이라는 도구가 가장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한 선생님이 많은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하나하나 조언해주는 게 힘들 거 같습니다.

 

A 2. 교과특질이나 단위 수업에 따른 내용에 따라서 선생님의 역할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렇게 저렇게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말보다 물꼬를 살짝살짝 움직여줘서 아이들이 스스로 발견해내도록 선생님이 넛지(nudge)를 주면 되겠죠. 또한 선생님이 교육과정이나 교수·학습전략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지금 초기 적응 단계라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있어서 힘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토론수업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 체득과 체험학습에 대한 철저한 계획 등이 이루어지고 난다면 학생을 믿고 멀리서 지켜보는 형태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Q 3. 핵심역량으로 교과과정이 개편된 만큼 평가 척도도 달라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가에 있어서 서술형 평가와 다양한 방법의 수행평가 비중을 늘린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이게 더 선생님과 학생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공정하게 평가가 진행될 수 있을까요?

 

A 3. 사지선다형에서 찍는 방법으로는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나 비판적 사고를 평가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따라서 평가도 교과 특질에 따라서 사지선다형으로 할지 서술형 혹은 수행평가로 할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입제도의 변화에 따라서 절대평가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명확한 성취기준이나 평가기준을 제시하면 서술형 평가나 수행평가에 대한 민원이나 투명성·공정성에 대한 오해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도록 해야겠죠. 그리고 이게 가능하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교사의 평가 전문성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수행평가를 형식적으로 했다면 이제는 수업시간 중에 글쓰기ㆍ토론ㆍ발표ㆍ실험ㆍ실습 등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여 수행평가를 내실화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핵심역량으로 교과과정이 개편되면서 평가 체제의 개선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명확한 기준 확립과 함께 교사의 전문성 및 학부모들이 신뢰하고 수용할 수 있는 공교육에 대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현장은 교육과정의 취지나 정부의 설명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지 않습니까? 필자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발표될 때 ‘우리의 학교교육도 이제는 정말로 바뀌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육을 해보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 후회와 부러움으로 바라본 학교에서 “교육이 바뀌었다!”는 환호성은 잘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수능방송과 수능은 그대로였고, 지식주입식, 강의식 교과 수업도 그대로였고, 신문이나 방송으로 밝혀지는 학생들의 삭막한 생활상도 아직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읽고 교사의 설명을 들어서 암기해야 할 것은 교과서에 담긴 지식일 뿐 것이 학교교육입니다.

   

  ■ 우리는 지금 어떤 교실에 있는가?

   

  다음은 좀처럼 바뀔 줄을 모르는 우리의 학교교육, 그 단면을 보여주는 신문기사입니다.

 

 

높은 가격에도 참고서를 구입하는 이유는 입시 위주인 우리나라 교육 구조 때문이다. 교과서는 가격은 저렴하지만 핵심적 내용을 설명 위주로 풀어놨다. 반면 참고서나 문제집은 실제 시험에 나오는 문제가 유형별로 정리돼 있다. 이 때문에 일선 학교들은 학기 중에는 교과서 위주로 수업을 하지만 단기간에 효율을 높여야 하는 방학 보충학습에서는 대부분 문제집을 교재로 쓴다.

…(중략)…

성균관대 양정호(교육학과) 교수는 "현재 핵심 내용만 담고 있는 교과서에 자세한 설명과 참고자료를 덧붙여 내실 있는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는 참고서나 문제집을 이북(e-book) 형태로 만들어 비용을 줄여나가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에 대하여 굳이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우리 교육의 한계라는 것을 실감할 필요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교실 수업이, 이 기사에서 지적한대로 ‘핵심적 내용을 설명 위주로 풀어놓은 교과서’가 적합하지 않은 수업이라면, 즉 ‘핵심내용만 담고 있는 교과서’로는 불가능한 탐구적이고 활동적인 수업이라면, 이미 우리는 훨씬 높은 수준의 교과서를 갖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필자가 보기에 획일적인 일제학습, 강의식 수업, 암기 위주 학습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우리나라 수업현장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유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다른 나라의 교육사례에서는 우수사례로 소개된 적이 전혀 없었던 수업형태를 우리가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매우 흔한 사례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편적인 사례이므로 우리에게도 당연히 매우 흔한 사례로 소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실, 특히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일 것입니다. 우리보다는 거의 모든 면에서 후진적이라고 해야 할, 적어도 교육적으로는 그리 ‘대단한 나라’로 보기가 어려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교실수업 및 교과서 활용에 관한 이 사례를 보면 우리의 수업 실태가 어떠한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할 것입니다. Pretoria의 Crawford라는 학교에 유학하고 있는 우리나라 학생과 현지 교사 각 한 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 일부입니다.

 

 

• 한국과 수업방식을 비교하면 어떠한가?

 

많이 다르다. 한국은 선생님이 칠판에 적으면 학생이 따라 적어가면서 암기하거나 선생님이 시험에 나올 만한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는 식의 수업을 진행한다면, 이곳에서는 토론 형식의 수업을 주로 한다. 예를 들어 영어 수업에서는 소설 한 편을 읽고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역사 수업 역시 하나의 사건이나 그 배경 사진을 가지고 학생과 교사 간에 의견을 나누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시험문제도 객관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서술형이 주를 이루며 한두 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로 마무리하는 형식이다. 수학의 경우에도 객관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식을 보기 위함으로 설령 답이 틀렸다 하더라도 식의 과정에서 점수를 얻을 수 있다.

 

• 교과서는 어떻게 사용하는가?

 

이곳에도 교과서는 있다. 그러나 많은 선생님들은 개인적으로 학생들에게 프린트물을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그 내용은 교과서 내용과 교사 개인이 준비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영어의 경우 타임지 기사를 가지고 토론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 시험에 나올 수도 있다.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교육방법을 한국의 교육과 비교 평가한다면?

 

한국이 학생들에게 주는 정보의 양은 훨씬 많다고 본다. 문제는 그 학생들이 그 정보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시험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는 시험을 마치면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 특히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지식을 얻기 이전에 학생들의 인성에 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적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교육은 매우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에 비해 ‘교육적으로는 매우 대단한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의 초·중등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교육의 모든 면이 대학입시에 붙잡혀 교육다운 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현저한 현상은 말할 것도 없이 교과서의 내용설명 및 암기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수긍하는 행정가나 학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상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으며, 사실은 그러한 교육을 고수(固守)하려는 막강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만약 사고력이나 창의력, 문제해결력 등의 고등정신능력이 국가경쟁력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이 확실한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당연히 장차 큰일 날 나라가 분명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확실하고 유일하게 세계 최강국이 될 것이 분명한, 두 가지 경우 중의 한 가지에 해당할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최강국이 되는 경우의 조건은, 교육의 목적이 지금까지 교육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온 것과 달리 주로 일제식·강의식·주입식 수업이 주효한 기억력, 암기력을 향상시키고 오지선다형 평가에 익숙한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있을 경우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교육학자들은 미래의 교육학자들로부터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 일제식·강의식·주입식 수업과 오지선다형 평가의 횡포를 막지 못했는가를 묻거나, 아니면 그것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낳았는데 왜 사고력·창의력·문제해결력 같은 능력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혼란을 일으켰는지를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초·기본교육의 중요성을 거의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행정가들과 학자들은, 초·중등교육을 단지 대학교육 준비과정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 아닌지, 사고력·창의력·문제해결력 같은 능력을 길러줄 수 있는 진정한 교육은 대학에서나 가능하고, 대학교육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자신들이 경험한 주입식 암기교육 외에는 다른 유용한 교육방법에 대해 그 효과를 실감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지식주입과 암기에 의한 기초·기본교육을 우습게 보는 교육관이나 교육자들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들과 겨루어 조금도 밀려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우리의 전통적 교육방법이 앨빈 토플러 등에 의해 무려 30년 전에 이미 전면적인 공격을 받았고(《제3의 물결》, 1980 : 시간엄수·복종·기계적인 반복), 그 공격을 전 세계적으로 공감했다는 것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교육방법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나 아닌지…… 그 ‘거대한 세력’을 온갖 의구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 우리는 어떤 교육을 추구해야 하는가?

 

  이돈희(2000)는 ‘새로운 지식관(知識觀)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신의 경험에 따라서 자신의 공동체적 삶의 과정 속에서 지식의 생산에 참여하며, 그러한 지식은 관조적 마음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을 통해서도 구성되고 개발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지식을 생산하는 원천이 되기도 하고 이미 알려진 지식의 타당성과 가치를 검증하는 활동으로서도 의미를 지니는 실천적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지식교육에 관한 한, 학교는 엘리트나 천재에 의해서 개발된 고도의 권위적 지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지식사회의 환경 속에서 대중에 의해서 생산된 지식을 대상으로 교육할 것이므로, 전달된 지식과 정보의 단순한 수용보다는 지식과 정보를 평가하고, 선택하고, 조직하고, 활용하고, 생산하고, 재구성하는 데 관련된 능력을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적 지식에 관한 이 해석에 대해 다양하고 창의적인 학습활동과 학습자료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처럼 명확한 정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 지식주입식 교육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보다 자극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공지능학자 로저 샨크(2001)는「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2050년대의 지식 교육을 이렇게 예측했습니다.

 

 

“지난 세기와 그 이전의 수많은 세기 동안, 교육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지성을 갖춘다는 것은 사실의 축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용하 는 능력, 어떤 관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은 정보의 축적을 의미했고, 대중이 생각하는 지성이란 자신이 축적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사실들이 벽에 씌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50년 뒤에 지식은 그저 알고 싶은 것을 큰 소리로 말하면 즉시 벽에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로저 샨크가 예측한 그 ‘앞으로 50년’ 중 벌써 10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우리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등의 걱정을 하지 않고 여전히 ‘교과서 중심 교육’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교육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교과서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행정가나 학자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지식과 정보의 양이 아무리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 핵심, 혹은 변하지 않는 내용을 교과서에 담으면 된다.”

 

그들은 아마도 이홍우(1979)가 “날로 팽창하는 지식을 모두 가르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기본’이 되는 것, 또는 ‘핵심’이 되는 것만을 골라 가르쳐야 한다”고 했을 때의 그 ‘지식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교육내용을 나타내는 용어로서의 지식의 구조는 ‘교과’의 의미와 ‘경험’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한 설명에서 ‘경험’의 의미에 소홀한 관점을 가진 상태이거나 “지식의 구조라는 용어는 교육내용 중의 특정한 것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교육내용을 새로운 관점에서 규정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나타내는 용어”라는 설명을 잘 읽지 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설명을 더 인용하면, “우리가 교육내용의 선정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지식 정보의 팽창을 걱정하는 것은 교육내용의 의미를 잘못 파악하는 데서 빚어진다.”고 한 것이나, “사실상 지식의 팽창은 근래에 와서 비로소 생긴 걱정거리가 아니라, 말하자면 교육학자들의 ‘습관적인 엄살’ 비슷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느낌이 든다.”면서 존 듀이(1916), 타일러(1949)의 ‘걱정’을 예시한 것은, 적어도 교육내용 혹은 교과서 구성은 변화무쌍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인용하는 것은, 지식주입식교육에 대해 워낙 견고한 교육자, 교육학자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은 바로 이 이야기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식 교육에 대해 이처럼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면 우리 교육의 잘못 되고 있는 온갖 모습이 다 보입니다. 다음은 최근 인지과학의 성과를 교수·학습에 접목한 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대니얼윌링햄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교수를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 ‘사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해력이든 비판적 사고든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생각을 잘하려면 우선 사실을 알아야 한다. 논리적 추론이나 문제 해결 같은 최상위 인지 과정도 사실 지식에 기반한다.”

- 사실 지식 습득을 위한 좋은 방법으로 신문 읽기를 들었다.

“캐나다의 실험심리학 대가인 스테노비치의 유명한 연구가 있다. 사람들이 지식을 어디서 습득하는가에 관한 조사다. 가장 좋은 정보원이 읽기였다. 일반적 지식 습득에서 신문, 진지한 저널, 책읽기가 TV 시청이나 대화보다 훨씬 낫다고 나왔다. 종합적 배경 지식을 얻기 위한 것으로 꾸준한 신문 읽기만 한 게 없다.” …(후략)…

 

 

  “신문을 보는 것은 이해력, 비판력을 키우는 데 최고”, “이해력도 비판적 사고도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나오며, 이런 배경 지식을 쌓는 데는 신문 읽기만 한 게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흡사 우리 교육현장이 신문기사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리의 학교교육이 정말로 신문기사 같은 자료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은 특히 중·고등학교의 경우 우리의 학교교육은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학교현장에 있을 때 지식습득보다는 이해력, 비판력, 창의력 신장을 중시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지식주입식에 식상한 반작용이었을 가능성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지식습득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해력이든 비판적 사고든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이 기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는가?” “누가 그걸 부정하는가?” 묻고 싶습니다. 이제 겨우 제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유아로부터 성인들이 보기에는 유치한 지식 몇 가지만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경우까지 당연히 지식부터 습득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창의력부터 발휘하는 경우도 있고,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창의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떠한 경우에도 지식습득은 이해력과 비판적 사고의 배경이 된다는 전제를 우습게 여기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교육의 현실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나라의 교수·학습 과정에서는 어떤 신문기사의 내용이 학습에 유용한 자료라고 하면 학생들에게 그 기사를 가능한 한 여러 번 읽게 하는 활동을 다른 어떤 활동이나 사고 과정보다 강조하고, 가능한 한 아예 그 기사 자체를 모두 암기해버리면 가장 좋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교수·학습 과정에서라면 그 신문기사처럼 학습자료의 한 가지쯤으로 읽고 다루어도 좋을 교과서를, 우리는 가능한 한 여러 번 읽을수록 좋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가능한 한 모두 암기해버리면 가장 좋다고 강조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추구해야 할 교수·학습활동을 어느 교과서 한 페이지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교과서로 어떤 수업을 전개해야 하는가, 어떤 교과서가 지식의 새로운 정의에 적합한 교과서인가, 아이들이 어떤 활동을 하게 해야 하는가, 교과서의 구성은 두고라도 각 교실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례를 한 가지만 보여드립니다. 단원 학습활동을 직접적으로 안내하는 이 사례에서 특히 "REMEMBER" 부분을 예시하고 싶습니다. 필자는 이 교과서에서 활동의 제목만 보았을 때는 순간적으로 ‘우선 어떤 지식 몇 가지를 기억하고 학습활동을 시작하라는 뜻이구나.’라는 선입견을 가졌다가 그것이 학습활동을 안내하는 지침이라는 것이 눈에 띠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초등학교 5~7학년 사회과 교과서(Harcourt Brace Social Studies,『The World』, 2002).

 

   

  앞으로의 우리 교육에서는, 아니 지금 당장 우리는, 이론과 실제가 다른, 그렇게 다른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를 메워야 합니다. 좋은 교육방법이라면 교사는 그걸 당장 도입할 수 있어야 하고, 행정가는 교사가 그렇게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학교와 교실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실천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교육,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교사가 왜 망설여야 합니까? 왜 교사들이 망설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까?

 

  ■ 필자의 이렇게 보았습니다.

 

▶ 주입식 수업에 대하여

◦ 어떤 형태의 수업이 ‘주입식’입니까?

- 왜 주입식에 대한 이론은 별로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까?

- 그런데도 왜 주입식이 끈질기게 유행하고 있습니까?

- 그렇다면 주입식은 좋은 것입니까?

- 이른바 가치·태도에 관한 학습에서는 주입식이 유효합니까?

- ‘도전 골든벨’도 학습입니까?(아주 대어놓고 하는 경우)

 

◦ 다음과 같은 수업은 주입식이 아닐까요?

- 수업안대로 성공적으로 몰아가는 수업, 즉 학습목표 제시 → 활동1 → 활동2 → 활동3 → 골든벨 퀴즈……의 순서를 밟아가는 수업

- 교사의 발문에 따른 질문과 대답만 허용되는 수업

- 안정적으로 참관할 수 있는 수업, 즉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수업

 

◦ 필자의 생각

- 주입식 수업은 아무리 화려하고 심지어 활동적이어도 ‘수업다운 수업’ ‘창의성을 유도하는 수업’은 아니다.

- 가치관·태도 형성에 관한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수업에서는 주입식 수업이 오히려 더욱 지양되어야 한다. 끊임없는 반복과

훈련은 비인간적일 수 있기 때문이고 교육적 효과가 적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 국어, 체육, 음악, 미술 수업에서는 주입식 교육이 더욱 지양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교과들의 수업은 인성교육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 활동 ①②③은 예상한 것들 중에서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일부를 변경할 수도 있고, 교체할 수도 있고, 생략할 수도

있고, 아이들의 결정을 따를 수도 있고, …………

 

▶ 학습자료에 대하여

 

◦ 왜 다양해야 합니까? ① 보기에 좋으니까 ② 만고불변의 진리이니까 ③ ……

◦ 필자의 생각

- 아이들마다 사고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다양한 사고의 장(長)을 마련해 주려는 것이다.

▶ 특정 수업 유형에 대하여

◦ 우리나라에서 도입·적용해보지 않은 수업 유형을 알고 있습니까?

◦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수업 유형,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수업 유형은 어떤 것입니까?

◦ 가령 예전의 ‘열린학습’은 아주 몹쓸 방법입니까?

◦ 필자의 생각

- 어느 수업 유형도 만능은 아니다. 대부분 항상적으로 적용되어야 마땅한 방법들이다.

▶ 수업의 대상에 대하여

◦ 어떤 아이를 주 대상으로 수업해야 합니까? 우수한 아이입니까? 그 아이라도 대학에 보내야 하니까? 똑똑한 놈은 장차 10만 명은 먹여 살리니까?

◦ 그렇다면 저능한 아이입니까? 지금 그렇게 하고 있어도 괜찮습니까?

◦ 그러면 이제 중간층입니까? 그럼 우수한 아이와 저능한 아이는 어떻게 합니까?

◦ 대화란 무엇입니까? ‘묻고답하기’입니까? 왜 해야 합니까?

◦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교실에서의 대화는 교사가 주인공이고, 교사가 주도하는 것이 옳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