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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가브리엘 루아 『그 겨울의 동화』

by 답설재 2011. 9. 30.

글쓴이·가브리엘 루아/그린이·니콜 라퐁드

『그 겨울의 동화』

옮긴이·조현실, 토토북, 2006

 

 

 

 

 

 

 

 

정년퇴임을 하기 몇  년 전, 그러니까 교육부에서 학교로 나와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을 때 작가 가브리엘 루아의 아름다운 소설 『내 생애의 아이들』 『세상 끝의 정원』 같은 작품을 읽은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내 생애의 아이들』에서 가브리엘 루아가 보여준 그 관점으로라면, 학교와 교실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천국이므로.

 

그 책을 읽은 행복감으로,

"가브리엘 루아(Gabrielle Roy)",

"루아(Roy)",

그녀는 이름조차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나 자신 그런 시절의 상처를 이제 간신히 치유한 상태였고 겨우 청소년기의 몽상에서 벗어나 아직 성년의 삶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이른 아침 교실에 서서 내 어린 학생들이 세상의 새벽인 양 신선한 들판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학교라는 함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영원히 그들의 편이 되어야 옳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 가브리엘 루아 『내 생애의 아이들』(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3), 180쪽.

 

 

그 감동으로, 언젠가 좀 조용해지면 읽겠다고 사 둔 『그 겨울의 동화』는, 정말로 동화책일 줄은 모른 책입니다. 그 겨울의 이야기가 동화 같았다는 가브리엘 루아의 그 정서로 붙여진 소설의 제목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동화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참 엉뚱하고 실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알고 보니 이 책 『그 겨울의 동화』는 진짜 동화책이더라는 것입니다. 하기야 소설과 동화가 꼭 구분되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암소 보씨가 당한 횡포를 재미있으면서도 신랄하게 파헤친 「암소 보씨」,

새끼를 낳아 놓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당하고 마는 고양이 이야기 「끝이 없는 사랑」,

개와 고양이 사이의 갈등과 우정, 애정, 그리고 인간의 횡포로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된 슬픔을 그린 「두 엄마」,

멸종 위기에 놓인 사슴의 모습과 자유에 대한 그리움 「숲의 황제」.

 

뒷표지 사진에 보이는 네 개의 작은 그림은, 네 편의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가브리엘 루아의 시선은 이 동화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따듯합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보씨의 가장 큰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젖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유를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고민일 정도였으니까요. 집안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작은 그릇, 중간 그릇, 큰 그릇들마다 모조리 우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제 우유, 그저께 우유, 오늘 우유, 저녁 우유, 아침 우유…… 시어질까 봐 함부로 섞을 수도 없었지요. 하긴 가만 놔둬도 시긴 했지만.  우린 우유를 짜자마자 먹기도 했고, 응고시켜 먹어 보기도 했습니다. 엄만 응고된 우유가 건강에 더 좋다고 했지요. 또, 찬 우유를 그냥 마시기도 하고 끓여서 마시기도 했지요. 엄마는 보씨한테서 짠 우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꼈습니다. 어떻게든 한 방울이라도 안 내버리려고 머리를 짜냈지요.  그랬는데도 보씨를 당해 낼 순 없었습니다. 어떡하면 우유를 다 마실 수 있을지 기껏 연구해 놔 봤자, 우유는 더욱더 많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중략)…  "우유요! 신선한 우유가 왔어요! 아주 찐해요! 보씨한테서 금방 짠 겁니다!"  길베르 아주머니는 내가 소란 피우는 통에 잠도 못 자겠다고 불평을 해댔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뭐가 어때서요? 걔도 일하는데 흥이 좀 나야 할 것 아니에요?"

                                                                                                                         -- 「암소 보씨」 중에서

 

 

 

 

 

동화는 니콜 라퐁드의 아름다운 그림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어떤 그림만 동화 같은 게 아니라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한참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두 엄마」에서 고양이 에스파뇰이 세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음은 이 동화의 한 장면입니다.

 

페키누아즈가 상자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걸 보고, 아줌마는 소릴 지를 뻔했습니다. "고양이들한테 해코지하지 마!" 라고요. 그러나 아줌마는 멈칫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머리를 쳐든 페키누아즈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달빛에 비친 페키누아즈의 눈에선 예전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랑이 넘치고 있었거든요. 전에도 페키누아즈에게서 사랑의 눈길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거나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을 뿐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달랐습니다. 그건 동물이 동물에게 보내는 사랑이었습니다. 다락방을 비추는 달빛만큼이나 정겨운 사랑이었지요.  또다시 상자 안에 머리를 집어넣은 페키누아즈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어미랑 똑같이 생긴 새끼 고양이들이 왜 그리도 예쁘게만 보이는 건지…… 어미는 쳐다보기도 겁날 정도로 못생겼는데 말이에요.

                                                                                                                            - 「두 엄마」 중에서

 

 

페키누아즈는 인간들이 성가시지 않게 가지고 놀기 위해 거세를 해 버린 애완견 개의 이름입니다. 위에 소개한 장면은, 타의로 거세 당한 페키누아즈가 고양이 에스파뇰의 새끼들을 보고 사랑을 느끼는 장면입니다.

 

가브리엘 루아의 이 동화들은, 어떤 동화들처럼 황당한 스토리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꾸미지 않은 우리의 생활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옮기고 있는데도 동화 특유의 사랑의 눈빛이 초롱불처럼 스며들어 있어 읽는 동안이라도 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면서 재미있게 읽느라고 정신이 없는 새 우리 인간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간절한 마음으로 고발합니다.  인간들이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에 갇혀서 생활하는 사슴의 모습을 표현한 부분입니다.

 

언뜻, 나무들 틈으로 포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포로는 보기에도 늠름한 카리부였습니다. 그 카리부는 곁에 있는 암컷들에 비해 몸집이 거의 두 배는 돼 보였습니다. 진흙 바닥에 발굽을 박고 서 있는 카리부의 머리 위론 거대한 뿔이 솟아나 있었고, 당당한 눈매에선 우두머리다운 풍모가 느껴졌습니다. 여기저기 털이 뭉텅이째 벗겨진 채 매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누더기가 다 된 낡은 망토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갇혀 있다는 건 분명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털은 잃었어도 위엄만은 잃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중략)…  카리브를 거기 가둬 놓은 건, 그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카리부는 평생 나쁜 짓이라곤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는 정말 아무런 죄도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머나먼 숲 속 어디에선가 작은 무리를 지어 헤메 다니고 있을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다른 무수한 아름다운 동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를 지은 건 인간들이었습니다. 법을 어기고 암사슴들, 심지어 사슴 새끼들까지도 죽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더욱 나쁜 건 어미 잃은 새깨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이지요. 사슴 떼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걸어다니는 숲처럼 보이던 예전의 어마어마한 무리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작은 무리들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몇 년만 더 있으면 카리부가 영영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지요. 실제로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종들도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그림책에서 보지 않는 한은, 그 동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때 가선 그 동물들이 멸종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에 대해 얼마나 후회를 하겠습니까?

                                                                                                                                   - 「숲의 황제」 중에서

 

 

 

 

 

 

 

 낮엔 더워도 그래도 가을이려니 한 것이 겨우 한 달? 아침저녁으론 '겨울이구나' 싶고, 일어서질 못하고 소파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만 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그 겨울의 동화』 이야기를 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저 보안등 불빛에도 곧 눈발이 날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살아가며 어떻게 자꾸 겨울만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