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점심시간에는 갑작스런 정전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독수리 타법으로 문서를 다듬던 어느 분은 그 파일이 날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건 사소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사무실 건물 1층은 커피숍, 2층은 병원, 3층은 벤처회사가 입주해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마침 수술 중이었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물 관리소장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걱정인 사람입니다.
그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단전을 해버리는 나라는, 아직은 후진국이지요. 비록 돈은 선진국만큼 많을지 모르지만 수준은 후진국이죠."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무역량이 어떻게 늘어나고 있고, 얼마 전에는 서울 G20 정상회의를 개최했고, 88올림픽과 한일월드컵을 개최한데다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한 나라이고…… 국민소득이 좀 주춤해서 그렇지 선진국 문턱에 다가선 나라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는 국격(國格)을 높여야 한다고도 했지 않습니까.
그런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까짓 단전 좀 되었었다고 '후진국' 운운한 것이, 좀 과했나 싶기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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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튿날 신문들을 살펴봤더니 어느 신문에는 전력거래소와 한전을 불시 방문한 이 대통령도 '후진국' 언급을 했다는 기사가 보였습니다. "…… 전기 소모를 줄여달라고 하면 5%, 10% 줄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국민들은 준비가 돼 있다. 여러분의 수준은 형편 없는 수준이다. 후진국 수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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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일이야 제가 잘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한전 부사장은 "단전 조치와 관련해 사전에 대국민 홍보를 할 의무 규정은 없다"고 했고, "가두 방송을 각 지역에서 사전에 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모르고 컴퓨터를 켜놓은 사람, 수술을 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좀 우둔하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지 걱정이 됩니다. 만약 며칠간 정전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스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은 비상식량을 준비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까? 양초도 좀 구해 놓아야 합니까? 그것보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가는데 난방도 걱정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저 분들 믿고, 넘어가는 것이 마음 편하겠지요? 대통령이 호되게 질책했으니까 무슨 수가 나겠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랏일이야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하고 있고, 책임감 강한 분들이 잘 하고 있지만, 교양 없는 사람이 돈만 많이 가지면 큰일 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추신> 신문(문화일보, 2011.9.20.18면)에 마이니치 신문 여론조사 기사가 났습니다. 「日 국민 65% "생활수준 떨어져도 節電해야"」 내용은 전력 제한령 해제했지만 효율 높은 점등으로 교체, 상시 라이프 스타일 정착, 지자체들 절전 아이디어 도쿄 30% 전력 절감 효과, 한국 블랙아웃과 대조 등이 그 개요입니다. 독도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참 한심한 나라지만, 이런 면은 부러운 나라입니다. 내일은 어떻게 되더라도 오늘은, 당장은 내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까 큰소리치고 살자는 사람들은, 이웃 일본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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