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어떤 그림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그림은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드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에 걸려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그림을 좋아합니까?"
그렇게 질문했을 때 내가 만약 초등학생처럼 "밀레의 만종입니다." 혹은 "모나리자요." 하거나, 피카소나 고흐의 어떤 작품을 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없는 사람' 혹은 '그래? 잘났네' 그런 취급을 받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만종'이나 '모나리자'는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흐, 피카소의 그림은 전시회에서 몇 번 '쏜살같이' 지나가며 일별했을 뿐이므로 좋아하고말고를 따질 수도 없습니다.
사실은 "그림" 하면 당장 떠오르는 화가가 이중섭, 모딜리아니입니다. 이중섭은 서귀포에만 가면 '이중섭미술관'에 가봤고,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도 두어 번 가서 도록을 사기도 했습니다. 김춘수, 김광림 등 여러 시인의 시를 모은 『시집 李仲燮』(문학과비평사, 1987)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서러운 화가, 일생이 詩가 되어버린 그의 그림을 좋아하게 되면 일 년에 서너 번은 서귀포에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딜리아니도 오랜 전부터 보고 싶어했고, 일산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모딜리아니를 좋아하면──여간해선 보기가 어려울, 어쩌면 다시 볼 수는 없을 그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좋아하게 되면──그때부터는 그 모딜리아니에 대해 무얼 어떻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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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면서 저 그림을 보면, 지금은 멀어져 간 고향의 어느 곳이 떠오릅니다. 그 곳은 내 가슴속에서 그 옛날의 모습보다는 훨씬 미화(美化)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있을 수조차 없는 그 시절 그 정경을 본 경험을 기억이라는 창고에 저장해 두고 주관적으로 치장만 하는 곳이 내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그림을 쳐다볼 적마다 이제는 세상에 있지도 않게 되어버린 고향, 그것도 좀 부풀린 정경을 그리워하는 꼴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습니까? 굳이 그 실체를 들추어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게 '고향'이니까요.
저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그의 도록에 「홍매화」란 시를 싣고 있습니다. 아마 그 시가 자신이 그린 그림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시의 정경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홍매화 / 도종환
눈 내리고 내려쌓여 소백산 자락 덮어도
매화 한송이 그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 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은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속 홍매화 한송이
이 詩가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좋아하는 詩이니 나도 좋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은 이 詩 속에 '따듯한 마음'이 들어 있다면 나는 그만입니다. 내가 저 그림 속에서 발견한 것이 그 '따듯함'이니까요.
따듯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면, 나의 경우로써 자주 난감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따듯한 마음, 그건 자칫하면 오해를 받기 일쑤입니다. 고백하자면 나의 경우는 그랬습니다. 이 어리석은 위인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도 당하고, 무안한 일도 당하고, 바보 취급도 받고………… 아, 다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나는 정기적으로, 아니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무턱대고 다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경계선에 다가서게 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도 또 그렇게 합니다. 진절머리를 내고도, 그래서 차가운 표정을 하고 지내자고 다짐하고도 또 그렇게 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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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중에는 엄마나 아빠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많은 세상이 되었으며, 학교는 그런 아이가 마음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회라는 걸 아는 어느 보건교사가 내가 학교를 떠나올 때 준 그림입니다.
"전적으로 윤리적인 듯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존재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진실들의 희생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일단 자신의 진실들을 인정하면, 그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뭔가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부조리를 의식하게 된 사람은 영원히 거기에 묶이게 된다. 희망이 없는 사람, 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더 이상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창조한 그 우주에서 빠져 나오려 애쓰는 것 또한 그만큼 당연하다."
-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49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