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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교장은 바빠야 잘하는 걸까?

by 답설재 2011. 4. 29.

 

교장은 바빠야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교장은 바쁘게 지내야 좋은 것이라면 얼마나 바쁜 것이 좋겠습니까?

바쁜 것은 좋은 것입니까? 훌륭한 것입니까?

어떤 일을 하든 바쁜 것은 좋은 것입니까?

가령 스님이나 신부님도 바쁘면 좋은 것입니까? 아니, 스님이나 신부님은 바빠도 괜찮습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바빠도 괜찮겠습니까?

신부님이나 스님, 선생님께서

"전 지금 분주하니까 나중에 오십시오."

"얘야, 난 지금 바쁘구나. 네 이야기나 들어줄 만한 시간이 없구나."

외롭거나 지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이라도 볼까 하고 갔는데, 그런 말을 듣거나 너무나 분주하신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와도 좋은 것입니까?

 

 

 

정년을 하고 몇 달이 지났을 때 찾아온 L은 제가 대단히 좋아하고 신뢰한 교사였습니다. 그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분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미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보통 교장이 아니구나' '나도 그렇게 지낼 수 있었는데……'

"그냥 교장실에 가만히 앉아 있고, 웬만해선 출장도 가지 않구요."

"심지어 스스로 알아서 일을 찾아 하고 있는 교무부장이나 연구부장에게도 '그거 꼭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그런 말씀이나 하며 지내구요."

 

교육청에서 시킨 일이나 그 학교 방송실 사용 등을 사례로 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들었지만 차마 그 이야기까지 꺼내지는 않겠습니다. (교육장이 시킨 일도 하지 말라고 했다거나 잘 마련되어 있는 방송실조차 활용하지도 않는다고 하면 그게 무슨 교장이냐고 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참 좋아해요. 일을 시키지 않으니까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아이들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도 못할 지경이고, 그러니까 학부모들도 모두 교장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지요."

"수업요? 모두들 열심히 해요.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니까 마음 편하게 가르치고 생활지도 하고, 그럴 수밖에요."

 

"일을 시키지 않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서 그렇게 좋아하는 게 아니고 인품이 뛰어나겠지. 그래서 모두들 좋아하는 거겠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제 이야기를 더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2004년 9월 1일, 제7차 교육과정과 '한국근현대사' 같은 교과서 문제와 '일본의 역사왜곡' '독도' 중국의 '동북공정' '고구려연구재단' 설립 같은 역사 문제 등으로 밤낮이 없던 교육부를 떠나 하루아침에 교장이 되어 용인의 성복초등학교를 찾아갔을 때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게 된 사람 같았습니다.

 

그 하루아침에 딴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분주히 움직이는 것 같은데 교장인 저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무언가 허전하기도 하고, 공연히 미안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그 교장실 창 너머로 가을 햇살이 기웃거리고, 고추잠자리가 날아 들어오면 그 교장실이 근무처가 아니고 출장이나 소풍을 나온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이나 다 좋은 사람들뿐이었고, 가만히 있는데도 제 눈치를 보아가며 움직였으므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하겠구나! 내가 움직이면 이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다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토요일에 부장교사들이 모여 함께 점심이나 하자고 하더니 추어탕 한 그릇을 사주며 연구학교를 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학교 선생님들에게 부탁하게 된 것이 몇 가지 있게 된 것입니다.

 

* 모든 학교행사는 아이들에게 돌려주자. 아이들에게 완전히 돌려주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을 도와주는 선에서 이루어지게 하자. 가령 운동회를 하면 대회장 인사를 어린이회장이 하게 하자.

 

* 거창한 이론을 도입하기 전에 학교 교육과정의 계획(편성)→실천(운영)→평가→계획…의 순환과정이 이루어지게 하자. 그 과정을 일원화하지 않은 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교과서 중심 교육을 버리고 아이들의 사고, 활동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게 하자. 활동1, 활동2, 활동3의 수업보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겠다면 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이야기부터 들어주자.

 

* 선생님들이 너무 분주하면 정신이 없게 되므로 가능하면 학부모들의 힘을 빌리자. 학부모 중에는 할일이 없어 심심한 분도 많고, 특정 분야에서 우리보다 더 많이 아는 분도 많다.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부모는 교사들을 응원하게 된다.

 

* 모든 교육활동은 의사결정을 거쳐 계획하고,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교육활동은 꼭 평가가 이루어져 다음 활동에 반영되게 한다. 교장은 한 명의 교사가 수립한 계획을 결재하는 시시한 사람이 아니다.

 

미안한 것은, 그렇게 하자 저는 더욱 더 조용한데,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이나 아이들이나 더 분주해졌습니다. 다행한 것은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했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래서 나는 더 조용히 하고, 나서지 않아야 하겠다고 다짐하며 지냈고, 그 학교에 발령 받은 날부터 3년 후 떠나는 날까지 "얘들아! 좀 조용히 지내라." "얘들아! 청소 좀 잘 해라." 단언컨대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지냈고, 그러므로 더욱 더 할일이 없게 된 저는 미안해서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은 '절대로'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냥 교장은 교장실에서 조용히 생각하며 지내면 참 좋겠다는 쪽입니다. 특별한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쁘면 당연히 마음도 바빠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집중력이나 판단력 같은 것에 혼란이 오기 마련이며, 교장이란 사람이 그런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 같은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장은 '고급인력'이므로 솔선수범한다며 청소나 하고 다니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급인력은 청소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 방의 정리정돈이나 쓰레기통 비우기 같은 일은 절대적으로 내가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교장은 청소나 뭐나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 가지 일들은 각각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거듭 설명하지만 교사 봉급의 약 세 배를 받는 사람이, 교사가 하는 일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훌륭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교장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고 묻는다면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학교행사는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있는지,

거창한 이론을 도입하기 전에 학교 교육과정의 계획(편성)→실천(운영)→평가→계획…의 순환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교과서 중심 교육을 버리고 아이들의 사고, 활동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선생님들이 너무 분주하면 정신이 없게 되므로 가능하면 학부모들의 힘을 빌리고 있는지,

모든 교육활동은 의사결정을 거쳐 계획하고,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교육활동은 꼭 평가가 이루어져 다음 활동에 반영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그렇게 되도록 시스템을 바로잡고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가만히 앉아서 노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좀 특별한 생각을 말하면,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아무도 "이런 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지도 않는데, 그 학교의 모든 일이 위와 같이 이루어진다면 그 교장은 정말로 멋진 교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그런 좋은 날들에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장학사의 블로그에서 「6개월 만에 헤진 교장선생님의 실내화」라는 글을 보고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교장은 교장실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제 생각은 절대로 절대적인 가치관이 아닙니다. 그냥 제 생각일 뿐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교장도 아닌 사람이 하는 말이 뭐 그리 대수롭겠습니까. 다만 저로서는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을 뿐입니다.

 

 

 

삶에는 어떤 흥분이 있어야 한다. 일상은 그저 지리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어제 했던 일을 하며 평생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격랑과 같이 사나운 지금이다. 부지런함은 미덕이지만,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그저 바쁜 사람은 위험에 처한 사람이다.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영역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 또한 매우 위험하다. 단순 반복적인 일로 매일을 보내고 있는 사람 역시 위험하다. 그가 성실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생각의나무, 1998, 77쪽).

 

"그가 성실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