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휴대폰과 교과서

by 답설재 2011. 1. 31.

2002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앞으로 50년』이라는 책입니다.*

 

우리가 아직 교사와 교실과 교과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50년 뒤에는 거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교육 개념을 바꾸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왜 수능 성적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왜 답을 암기하는 것이 지능의 증거라고 생각했는지 물을 것이다.(301)

 

'교사와 교실, 교과서가 사라진다고?'

'지금 우리가 그런 걸 가지고 교육을 하고, 지능이나 수능성적을 중시한 게 그때 가서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지난 세기와 그 이전의 수많은 세기 동안, 교육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지성을 갖춘다는 것은 사실의 축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용하는 능력, 어떤 관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은 정보의 축적을 의미했고, 대중이 생각하는 지성이란 자신이 축적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사실들이 벽에 씌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50년 뒤에 지식은 그저 알고 싶은 것을 큰 소리로 말하면 즉시 벽에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295~296)

 

'그래! 인터넷에 다 나오는 정보나 지식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외울 필요는 없겠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외울 것은 외워야 한다는 주장이 '헛된 논리', '고집'일 것 같은 느낌도 들어. 백 번 양보해서 외우는 공부가 중요해도 그렇지, 그걸 애써 학교에서만 외워야 한다는 건 억지에 지나지 않겠지? 왜 꼭 학교에 가서 그걸 외워야 한다고 주장해?'

'그렇다면 결국 현재의 학교교육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지능이 단순히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능력일까, 아니면 어떤 질문을 할 줄 아는 능력일까? 대답이 평가 절하될수록, 질문은 더 가치를 갖게 된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대답 기반의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런 표지들은 어디에나 있다.

<제퍼디>나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나?> 같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트리비얼 퍼슈트Trivial Pursuit> 같은 게임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에서, 대답은 왕이다. 우리 학교들은 점점 더 시험 위주로 향해 가고 있다. 학교는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대답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되어 왔다.(296~297)

 

'정말 그래! 학교는 아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보다는 목록을 마련해 놓고 그걸 주입하는 일에 힘쓰고 있지. 그러므로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가르친 걸 물으면 아이들이 대답하는 일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거지.'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앞으로 50년이라…… 아직은 멀었네? 내가 죽은 후에도 세월이 한참 흘러야 하겠군. 그렇다면 뭐……

 

그러던 것이 글쎄 벌써 그 50년 중 10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직 40년이나 남았잖아?" 그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사와 교실과 교과서가 없어진다는, 말하자면 학교가 사라진다는 그 일은 어쩐지 40년이 흐른 후에야 일어날 것 같지가 않고, 어쩌면 그 안에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IT 개발연구센터인 벨연구소 김종훈 사장은 3~5년 내에 휴대폰 없이 통화하는 세상이 온다고 했습니다. 냉장고나 세탁기로도, 그러므로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니, 『앞으로 50년』이란 책에서 로저 샨크라는 인공지능학자가 "앞으로 50년 후에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들이 인터넷에 의해 벽에 다 씌어져 있다면 어떻게 하렵니까?" 하고 물은 그 일이, 50년이 아니라 단 10년, 혹은 5년 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 된 것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거짓말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2009년에 신문에서 이런 글을 본 적도 있습니다.**

 

미래의 교실에는 연필과 공책이 별도로 필요 없다. 칠판은 물론 분필도, 교과서도 볼 수 없게 된다. 개인 단말기에 이미 디지털화된 교과서 1년치 분이 저장되며, 학생들은 이것으로 학습하고, 필기하며 과제물 자료를 찾는다. 출석 체크 역시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 즉시 이루어진다.

먼 미래 얘기가 아니다. 전자칠판은 PC 기능을 그대로 수행하기 때문에 수업내용을 녹화해서 학생들에게 복습자료로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몸이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한 학생은 집에서 실시간으로 해당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 성균관대 등에서는 이미 전자칠판과 PC로 수업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조만간 전국 초·중·고교에 이를 보급할 방침이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 'u클래스 체험관'에서는 이미 전자칠판, 전자교탁, 무선주파수인식기술(RFID) 출석인증 체계, 전자사물함, 태블릿PC 등 각종 디지털 장비와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전자 업계가 그렇다면 교육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교육은 10년 후에도, 50년 후에도, 가령 『국사』 교과서에 쓰인 내용을 일주일에 세 시간씩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아이들에게 일제히 설명하고 경청하고 외우는 그런 교육을 해야 할까? 그런 교육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걸 걱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기도 합니다. 어느 날 우리 정부에서 이렇게 선포하는 날이 올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당신은 자녀를 차라리 학원에 보내고 싶다는 거죠? 아무래도 학원이 학교보다 더 잘 가르치는 것 같다는 말씀이죠?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학교에 보내든 학원에 보내든 맘대로 하십시오. 그곳이 더 잘 가르친다니 우리는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혹 집에서 가르치고 배워도 좋습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도 좋습니다."

 

"공교육은 기필코 사교육을 이겨야 한다!" "사교육비를 줄여야 한다!!!" 그 열정과 그 노력을, 현재의 상황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다만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때 우리 교과서는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현재의 이 교과서들은 '교과서박물관'에 가야 구경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

* 로저 샨크,「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존 브록만 엮음 / 이한음 옮김,『앞으로 50년』(생각의나무, 2002)

** 오창규(논설위원)「'매직미러'」『문화일보』2009.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