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 영결식 날입니다. 어디쯤 가고 계실까요?
점심 시간만 되면 운동삼아 교보문고에 드나들던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그분의 책을 선 채로 읽었던 일이 송구스러워집니다. 그분이 별세하셨다는 기사를 보고 그런 마음이 들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못난 사람입니다.
『현대문학』 2010년 9월호에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출간 기념 박완서 특집'이 실렸습니다.1 열두 명의 쟁쟁한 작가들이 박완서 선생님과의 인연, 미담, 추억, 일화들을 소개했는데, 소설가 김연수의 「왼쪽부터 김연수 씨, 김연수 씨의 부인……」이라는 글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2
그가 소설가로 등단하자 그의 부친이 자랑을 늘어놓아 지방신문에 더러 그의 기사가 실렸고, 그런 연유로 조선일보에 실린 <동인문학상> 수상 기념 사진을 그 지방신문이 옮겨 실으면서 김연수 씨의 옆에 서 있는 박완서 선생님을 그의 부인이라고 소개해버린 해프닝을 쓴 글이었습니다. 그 끝부분을 옮깁니다.
…… 몇 달 뒤, 집에 내려갔다가 나는 아버지가 스크랩한 여러 기사들을 보게 됐다. 보훈대상자인 아버지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한 기사 같은 것과는 절대로 무관하게 내 이름이 나오는 기사만 스크랩한다. 거기에는 『김천신문』의 기사도 있었다. 한때 내가 처음 등단했을 때는 기사가 되기도 어려운데 『김천신문』에는 기사가 실리는 일이 있었다. 그건 모두 아버지의 로비 때문이라고 봐야만 한다. 그래서 약간 삐딱한 마음으로 <동인문학상> 수상과 관련한 기사를 읽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에는 기사와 함께 『조선일보』에서 건네받은 시상식 관련 사진이 실려 있었다. 캡션까지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건 없어서 『김천신문』에서 사진 아래에다가 직접 캡션을 달아놓았다. "왼쪽부터 김연수 씨, 김연수 씨의 부인……" 하지만 아무리 사진을 들여다봐도 내 옆에 선 그 부인은 박완서 선생이었다. 그래서인지 어쨰서인지 지금도 박완서 선생만 뵈면 가슴이 다 슬렌다.
하기야 신문에 실린 사진을 얼핏 보면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이 젊은 소설가의 부인 같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3 그러니 얼굴이 작게 나오는 기념사진 같으면 그렇게 봐도 원망하거나 빈축을 살 일도 아닐 것입니다.
◈
1998년 가을 아니면 초겨울이었습니다.
교육부장관이 '우리도 미국처럼'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힐 책을 선정해서 목록을 만들어 발표하자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교육부 지정 필독도서·권장도서 목록이 될 것입니다. 참 좋은 일이고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직원이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끝까지 반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관은 그 일의 실무를 제게 맡겼습니다. '큰일났구나!'
우선 작가 몇 분, 양서(良書)를 많이 출판하는 출판인, 뛰어난 독서지도 교사들을 초빙해서 이 일에 대한 조언을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때 초빙된 여러 인사들 중에 박완서 선생님도 들어 있었습니다. 어찌어찌 연락처를 알아내어 전화를 했더니 차근차근 사연을 다 듣고 나서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생 그런 일로 관청에 드나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많이 읽히자는 일이므로 한번 나가 보겠지만 어떤 역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로서는 우선 회의를 개최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학생들 책 읽히는 얘기라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다 좋습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때 교육부 회의에 초빙된 분들 중에는 아직까지 꼿꼿하게 유명한 출판인으로 남아 있는 분, 열혈 독서지도 운동가로 활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그 회의에서 우리 교육의 실정을 비판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좋은 책을 많이 읽히는 일의 중요성을 특유의 따듯한 음성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게 얘기해주신 걸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양서 목록을 만들어 발표하겠다는 그 일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무모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실제로 그 일에 매달린 우리는, 가령 『어린 왕자』만 하더라도 그 번역본이 50종은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맥이 빠졌습니다. 장관은 아예 저자와 책 이름은 물론 출판사까지 명시해야 제대로 된 목록이라고 했으므로 이런 경우 터무니없는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 후의 겨울방학 때였는데 그게 그해였는지 이듬해였는지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한겨울이었습니다. 어느날 오전, 유니세프(UNICEF :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 한국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국제이해교육 교사연수에 강의를 하려고 어느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 강의장을 찾는데 박완서 선생님이 눈에 띄었습니다.
얼른 다가가 안부를 여쭙고, 그때 그 업무 때문에 폐를 끼쳐 송구스럽다면서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대학 캠퍼스에서 뵈옵게 되어 난처하다는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당장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김만곤 선생이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많이 읽히자는 일로 그 회의를 했으니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커피야 뭐니뭐니 해도 자판기 커피가 제일이죠. 날씨도 그렇고 지금 이야기를 좀 하고 나왔더니 커피 생각이 납니다. 갑시다. 어디 가까운 곳에 자판기가 있겠지요."
그러면서 배웅나온 유니세프 직원을 돌려보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자판기 커피맛이 제일"이라는 그 말씀에 맞장구를 친 것은 물론입니다.
그분은 안성기 씨와 함께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일하시는 중이었고, 저는 1989년 겨울부터 유니세프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여 가령 『국민학교 클럽활동 교사용지도서 지구촌 클럽』을 혼자서 맡아 집필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날 그 대학 캠퍼스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인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국제이해교육 교사연수를 하게 된 것도 제가 꾸준히 주장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그날 커피를 마시며 댁이 워크힐 지나 구리 교문인가 어디라고 하셨는데, 제가 웬만큼만 정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이라도 댁을 방문했겠지만,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으니 이 일만 봐도 자신이 참 못나고 한심하다는 걸 실감합니다.
그러나 그날 그 차가운 겨울 오전에 그분과 나란히 서서 마시던 그 자판기 커피의 맛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젠 커피조차 마음놓고 마시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런 시간들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선생님, 편안히 잠드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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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대문학』2010년 9월호, 225~293쪽.
2.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성균관대 영문과 졸업. 1994년 '작가세계문학상' 등단. 소설집 『스무 살』『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나는 유령작가입니다』『세계의 끝 여자친구』등. 장편소설 『7번 국도』『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밤은 노래한다』등.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대산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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