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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만남, 죽음과의 만남』

by 답설재 2010. 12. 14.

 

 

 

정진홍, 『만남, 죽음과의 만남』

궁리출판, 2003

 

 

 

    Ⅰ

 

 2003년에 나온 책이니까 오래 된 책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래 보관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혹 절판되었다면 "보세요! 홍보를 많이 하는 처세서(處世書)만 찾으니까 이런 좋은 책이 사라지잖아요." 원망스런 이야기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이 책의 내용에 미련을 갖고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도록 하는 책인가?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 그런 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쓴 책을 봐야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뒷표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사랑의 진술을 바탕으로 하여 죽음을 맞으면, 죽음은 그대로 삶의 완성입니다. 마침내 죽음은 삶이 짐작하지도 못한 위로이고 평화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사랑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위로와 평화를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죽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 죽음은 그래서 내 존재 양태가 바뀌는 통과 의례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긋는 희망과 꿈의 계기가 죽음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그러한 계기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죽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움이 비롯하는 처음 순간일 것입니다. 내 죽음은 내 되태어남의 계기일 것입니다. 사랑은 그러한 신비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 죽음을 내 품 안에 안을 수 있어야 하고, 내가 그 품 안에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것 같습니까?  참 좋은 이야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래도 죽음이 사랑 같을까 싶어집니다. '위로'하기 위한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Ⅱ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어른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 "  앞날개에서 이렇게 시작된 필자(종교학자, 서울대학교 교수 역임, 학술원 회원) 소개는 뒷날개에서 이렇게 끝납니다.  "이제는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아도 곧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그만 하면(서울대학교 교수 역임, 학술원 회원 등) 어쨌든 객관적으로는 참 좋은 경우인데, 나이가 든 것(필자의 표현대로라면 "곧 죽을 때가 된 것")을 정말로 '다행한 일'이라고 여기는 걸까? 정말로 그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책이 좋습니다. 우선 종교적이지 않습니다(종교적인 게 좋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종교학자가 쓴 책인데도 그렇습니다. '종교적인지 아닌지', 그것은 객관적으로, 엄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읽으며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종교적인 책은 그런 책이냐고 따지고 들까봐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이 책은 또, 막무가내로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그렇다면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식이 아닙니다.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입니다.

 

 

    Ⅲ

 

죽음 앞에서 가벼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태도와 자세는, 젊은이에게도 마찬가지이므로 '까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도 사실은 늘 자신을 '젊은이'인 줄 착각하고 지냈습니다(제가 지금 '늙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어느새 '젊은이'가 아닌 곳에 와 있습니다).  혹 아직 '젊은분'이, 재미도 없는, 눈요기도 없는, 여기 이 블로그의 이 책 소개까지 왔다면 분명 특별한 일입니다. 부디 방심 말고 두 눈 똑바로 뜬 채 그 세월의 젊음을 잘 지켜보기 바랍니다.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떨어지고 헤어지는 것을 몹시 저어합니다. 맺음이 풀리고 이어진 가닥이 끊어져서 가닥가닥 제각기 풀풀 늘어져 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살이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얼마나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69)

 

‘만남과 헤어짐’이 우리 삶의 흐름을 점철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더할 수 없이 커다란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일컬은 헤어짐의 슬픔이나 아픔의 자리에서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또한 우리가 익히 겪는 일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의 정서가 지닌 애틋한 아름다움은 그저 화사하게 아름다운 그런 것으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깊은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사랑의 신비란 그렇게 아픔과 슬픔에 촉촉이 젖어 피어낸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헤어짐의 고통이 먼저 있지 않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정서입니다.(72)

 

되만남의 ‘희구希求’와 되만남의 ‘현실’은 같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은 실은 지금 이곳에서는 도저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내밀하게 승인하면서도 그 절망을 견딜 수 없어 아프게 절규하는 소박한 승화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이러합니다.(75)

 

홀로 있어 외로운 아픔이 홀로 있기를 바라는 의도적인 희구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역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렇다는 것을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121)

 

 죽음이 천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 천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미 죽어 있어 귀하고 천하게 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값싸진다는 것은 실은 삶이 천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다. 망자와의 만남을 꿈꾸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삶이 꿈을 잃어버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지닐 수조차 없다는 것은 그의 삶이 그만큼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가면서 정을 주고받아 그리움에 간절해진 따뜻한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망자를 외면하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210~211)

 

‘참으로 죽음이 두렵거든 지금 여기에서 더 착하고 바르게 살자. 참으로 괴로워 죽고 싶도록 죽음이 아쉽거든 더 사랑하면서 더 아름답게 살자. 그래서 참으로 부활과 재생과 윤회와 온갖 되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도망치고 싶도록 두렵거나 아니면 안타까이 그리워지거든, 우리 지금 여기에서 더 사랑하고 더 착하고 더 바르게 더 아름답게 살자!’ 이때 우리는 어느 틈에 죽음을 넘어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합니다.(257)

 

우리는 죽음을 낯설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은 낯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극한 일상 속에서 벌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아주 비일상적인 일로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삶 속에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상하지만 낯설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죽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은 참 이상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낯설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은 삶 속에 있는 일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함부로 다루지 않듯이 죽음도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301)

 

 

  제1부 죽음, 그 삶의 현실 - 비존재와의 만남

  제2부 비탄의 윤리 - 사별이 남기는 얼룩이들

  제3부 죽음의 사회학 - 죽어버림과 죽여버림

  제4부 제사, 또는 추모의 의미 -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

  제5부 죽음을 넘어서 - 부활과 재생의 현실

  제6부 죽음과의 만남을 위하여 - 죽음을 준비하는 일

  

 

  Ⅳ

  

이 책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긴 이야기, 그 죽음 물음의 끝말은 의외로 쉽고 단순합니다. 삶을 초조해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삶을 감사하는 사람은 죽음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310)

 

그리고 저는 이것을 확인합니다. 삶이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끝맺음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