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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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에는 드라마 『결혼해 주세요』를 봅니다. 아내가 전에는 『이웃집 웬수』를 좋아해서 함께 재미있게 봤는데 그 드라마가 끝나자 요즘은 이 드라마에 심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곤혹스러운 건 아내가 저녁에 볼일이 있어 그 드라마를 혼자 본 날의 스토리 전개를 물을 때입니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아,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야. 거의 그대로야."
저는 두 가지 이유로 곧잘 그렇게 대답합니다. 아내는 "뭐가 그러냐?"는 토를 달진 않지만 그럴 땐 제 마음이 편한 건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대라면 우선 '그대로'라는 게 제가 보기에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야기 전개는 되고 있는데 굳이 설명할 만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혼자 있을 땐 그걸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습니다.
"응, 그 김태호 교수는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고, 아내 남정임은 좀 우울하지만 가수 활동에 전념하는 것 같아."
때로 그 정도로 이야기하면 성의 있는 소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개도 이미 써먹었습니다.
그 착한 아내(남정임)와 이혼까지 하고, 대학으로부터는 폭행을 했다며 정직을 당하고, 가족들은 누가 어떻게 되는지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지내던 그 밉살스런 김 교수(35세, 사회학 전공)가, 어제 저녁에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는 장면을 봤습니다. 병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당장 집을 나서 시장을 보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자장면이나 사먹고 들어가자며 막무가내로 식당으로 끌고 들어가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느냐면서도 "맏아들이 최고"라며 좋아합니다. 그는 자장면이 나오자 얼른 비비더니 그 그릇을 어머니 앞으로 옮겨줍니다.
'아, 김태호 교수가 이제 정신이 들었구나! 드디어 인간이 되는구나!'
더구나 어머니의 표정을 연민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하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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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1972년 겨울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겨우 마흔여덟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에 자장면을 한 번 아니면 두 번 드셨을 것입니다. 틀림없을 짐작이고, 그것도 우동과 합쳐서 두 번 이내일 것입니다.
그해 가을, 의사는 미국엘 간다 해도 가망이 없다며 퇴원하라고 했고 맛있는 것이나 사드리라고 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시골 역 앞 식당에서 우동을 시켜드렸습니다. 언젠가 장날 저녁에 자장면 이야기를 하신 걸 기억했고, 편찮으시니 자장면을 드시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우동으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물만 두세 번 뜨시고 말았고, 새로 주문한 삶은 달걀조차 쳐다보시기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 가을 내내 한번도 일어나지 못한 채 누워만 계셨고, 첫눈 오는 날 오후에 저승으로 가셨습니다. 눈 내리는 하늘이 노랗게 보여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가셨어도 그날은 저물었고, 그 후로도 어김없이 세월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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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이나 우동 같은 건 중국음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굳이 그런 걸 건 따질 필요까진 없고, 하여간 저는 자장면이나 우동, 짬뽕은 물론 기름진 중국음식을 참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교과서 정책 문제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보내준 중국 출장 때 4박5일 내내 중국음식만 먹어도 전혀 싫지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제 그 기름진 중국음식을 피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지난 1월과 9월에 두 차례에 걸쳐 심장 가까이 있는 혈관에 보조기구를 집어넣는 일을 겪었고, 그 후에도 119에 전화까지 해서 병원에 실려간 일도 있으니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퇴원했을 때엔 먹는 것에 대한 제한에 불평을 늘어놓았고, 그 불평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기름진 음식을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TV의 맛집 소개를 볼 때는 저절로 침이 넘어가니 더 할 말이 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아직도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흔여덟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 마지막을 기억하고 살았다면 자장면을 그처럼 즐겨먹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드라마에 나오는 김태호 교수를 밉살스런 녀석이라고 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35세에 이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데 저는 맛집 소개를 쳐다보는 65세가 되어서까지도 침을 흘리고 있으니까 무슨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구나.' …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한 채로 병들고 나이들어 가고 있으므로, 죽어 저승에 가면 그 혹독한 형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
'그런 나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또 너지겠지. 저승에 가서도 나는 어머니를 괴롭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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