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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자장면

by 답설재 2010. 12. 13.

 

 

 

자장면

 

 

 

 

  주말 저녁에는 드라마 『결혼해 주세요』를 봅니다. 아내가 전에는 『이웃집 웬수』를 좋아해서 함께 재미있게 봤는데 그 드라마가 끝나자 요즘은 이 드라마에 심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곤혹스러운 건 아내가 저녁에 볼일이 있어 그 드라마를 혼자 본 날의 스토리 전개를 물을 때입니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아,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야. 거의 그대로야."

  저는 두 가지 이유로 곧잘 그렇게 대답합니다. 아내는 "뭐가 그러냐?"는 토를 달진 않지만 그럴 땐 제 마음이 편한 건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대라면 우선 '그대로'라는 게 제가 보기에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야기 전개는 되고 있는데 굳이 설명할 만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혼자 있을 땐 그걸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습니다.

  "응, 그 김태호 교수는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고, 아내 남정임은 좀 우울하지만 가수 활동에 전념하는 것 같아."

  때로 그 정도로 이야기하면 성의 있는 소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개도 이미 써먹었습니다.

 

  그 착한 아내(남정임)와 이혼까지 하고, 대학으로부터는 폭행을 했다며 정직을 당하고, 가족들은 누가 어떻게 되는지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지내던 그 밉살스런 김 교수(35세, 사회학 전공)가, 어제 저녁에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는 장면을 봤습니다. 병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당장 집을 나서 시장을 보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자장면이나 사먹고 들어가자며 막무가내로 식당으로 끌고 들어가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느냐면서도 "맏아들이 최고"라며 좋아합니다. 그는 자장면이 나오자 얼른 비비더니 그 그릇을 어머니 앞으로 옮겨줍니다.

  '아, 김태호 교수가 이제 정신이 들었구나! 드디어 인간이 되는구나!'

  더구나 어머니의 표정을 연민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하고 묻습니다.

 

 

 

 

  어머니는 1972년 겨울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겨우 마흔여덟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에 자장면을 한 번 아니면 두 번 드셨을 것입니다. 틀림없을 짐작이고, 그것도 우동과 합쳐서 두 번 이내일 것입니다.

  그해 가을, 의사는 미국엘 간다 해도 가망이 없다며 퇴원하라고 했고 맛있는 것이나 사드리라고 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시골 역 앞 식당에서 우동을 시켜드렸습니다. 언젠가 장날 저녁에 자장면 이야기를 하신 걸 기억했고, 편찮으시니 자장면을 드시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우동으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물만 두세 번 뜨시고 말았고, 새로 주문한 삶은 달걀조차 쳐다보시기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 가을 내내 한번도 일어나지 못한 채 누워만 계셨고, 첫눈 오는 날 오후에 저승으로 가셨습니다. 눈 내리는 하늘이 노랗게 보여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가셨어도 그날은 저물었고, 그 후로도 어김없이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장면이나 우동 같은 건 중국음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굳이 그런 걸 건 따질 필요까진 없고, 하여간 저는 자장면이나 우동, 짬뽕은 물론 기름진 중국음식을 참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교과서 정책 문제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보내준 중국 출장 때 4박5일 내내 중국음식만 먹어도 전혀 싫지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제 그 기름진 중국음식을 피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지난 1월과 9월에 두 차례에 걸쳐 심장 가까이 있는 혈관에 보조기구를 집어넣는 일을 겪었고, 그 후에도 119에 전화까지 해서 병원에 실려간 일도 있으니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퇴원했을 때엔 먹는 것에 대한 제한에 불평을 늘어놓았고, 그 불평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기름진 음식을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TV의 맛집 소개를 볼 때는 저절로 침이 넘어가니 더 할 말이 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아직도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흔여덟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 마지막을 기억하고 살았다면 자장면을 그처럼 즐겨먹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드라마에 나오는 김태호 교수를 밉살스런 녀석이라고 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35세에 이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데 저는 맛집 소개를 쳐다보는 65세가 되어서까지도 침을 흘리고 있으니까 무슨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구나.' …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한 채로 병들고 나이들어 가고 있으므로, 죽어 저승에 가면 그 혹독한 형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

  '그런 나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또 너지겠지. 저승에 가서도 나는 어머니를 괴롭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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