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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 얼굴 Ⅵ (그 밤들의 붉은악마)

by 답설재 2010. 6. 20.

'붉은악마'는 2002 한·일 월드컵 때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참 아니꼬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교수나 학자 등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그 '붉은악마군단'을 창설한 것처럼, 혹은 자신은 그런 문화가 창조될 것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글도 쓰고 강의도 하고 회의장 분위기를 주름잡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나도 이번에 '붉은악마'들을 잘 봤지만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걸 그렇게 하지 않고 무슨 문화니 뭐니 하면서 그걸 현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자신이 '도사'기 때문에 벌써부터 이런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둥 어떻게 했다는 둥 온갖 폼을 다 재니 그 꼴이 얼마나 아니꼬왔겠습니까.

두고 보십시오. 그들은 이번에도 또 그렇게 할 준비를 하고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소리를 들을까봐 겁이 나지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이야기하고 잘 난 체하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뭐 하려고 잘 난 체하겠습니까.

 

붉은악마!

악마!

붉은.

그들이 악마(惡魔, devil, demon)입니까?

아니죠.

자기네들이 '악마'라고 하니까 악마는 악마지만 '붉은악마'지요.

멋지고

놀랍고

신선하고

아름답고

자신들이 절대로 악마같은 짓을 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붉은악마 노릇'을 하니까 악마라는 걸 굳이 숨기지도 않고

숨기기는커녕 "내가 바로 그 악마요!" 하듯 온갖 악마 표시를 다한 채

"여기 악마가 있다!"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백주대낮이나 밤중이나 가리지 않고 나타나고

그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오히려 좋아하고

악마라는 것을 나타내는 온갖 치장을 다 하고 나타나는데도 겁내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겁내기는커녕 우리나라에 볼일 보러 잠깐만 와 있는 외국인들조차 "나도 그 악마 좀 하고 갈게요!" 하고 금방 물이 들어서 그 악마 패거리의 일원이 되고

가능하면 떼를 짓게 되고 떼를 지어 다니는 걸 좋아하고……

 

나도 '붉은악마'들이 참 좋습니다.

한 아파트에서 아래윗집에 살면서도 미소를 짓기는커녕

목례도 하지 않고

내가 목례라도 하면 겨우 받아놓고는 영 어색해하고

내가 그 집 아이를 귀여워하면 귀엽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면

'언젠가 유괴해갈 노인이 아닐까?'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은 이 사회에서

우리의 저 붉은악마들이 마구마구 퍼져나가

아래윗집은 물론이고

옛날처럼 서로 정답게 살기 시작하면 참말로 좋겠다 싶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젠가 전철에서

내게 목례를 하고 윙크까지 한 그 서양여자에게

'별꼴이야, 정말! …… 저 여자 미쳤나?'

그런 눈초리로 쳐다봤던 게 후회스럽고 부끄럽습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B조 예선 2차전 경기가 있었던 17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앞에 12만명(경찰추산 오후 10시 현재)의 시민이 모여 열광적인 거리 응원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과 함께 조선일보(2010.6.18,13면)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리스 팀을 물리친 이튿날, 이런 사진이 실린 신문을 찾았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문기자들도 비오는 밤에는 다 집에 가는가?'

'아니면, 사진 찍으러 나갔다가 카메라를 둘러멘 자신들도 악마로 변신하고 악마짓을 하느라고 쓸 만한 사진 한 장 찍지 못해 편집부장에게 혼만 나고 말았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불로그에는 좋은 사진이 참 많았습니다. 한 장 한 장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 가슴이 서늘해지기까지 하는 사진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렇게 너무 좋은 사진들이어서 양심상 도저히 캡쳐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이야 이미 지난 날짜의 신문이고, 어느 신문에서 가져왔다고 밝히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붉은악마!

그 악마들의 함성이 늘 들려오면 좋겠습니다.

악마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