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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노인취급 Ⅰ

by 답설재 2010. 6. 8.

 

 

 

노인취급 Ⅰ

 

 

 

  저녁에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데 한 여학생이 불쑥 다가섰습니다. 나중에 28세라고 한 그 학생은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예쁜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앙케트 답 좀 해주실래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과 4학년이라고 했습니다. 보안등 아래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짐작한대로 노인의식조사였습니다. 그 여학생은 취지부터 설명하더니 열댓 문항으로 된 그 설문을 하나하나 짚어나갈 요량이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며 받아들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대부분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로 답하는 각 문항을 읽어봤더니 대체로 ‘보통이다’에 답해졌습니다.

 

  그러나 “노인정, 놀이터 같은 곳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어느 정도로 하며 지냅니까?"에는 '매일' '주 1~2회' '월 1~2회' '연 1~2회' '전혀 안 한다' 중에서 답해야 했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전혀 안 한다'에 답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노인정이나 놀이터에서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대답은 질문의 취지에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답지에 ∨표를 한 것이 위의 것을 합쳐 세 문항이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더 생각납니다.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까?"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물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에 ∨표를 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오래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에게 "내가 그때 수술을 받지 못하고 죽었으면 참 깔끔하긴 했을 텐데……" 했더니 그동안 둘이서 매장은 절대로 안 되고 화장을 한다고 그만큼 얘기했는데도 "그럼 벌써 흙이 되었을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오래오래' 살면서 뭘 하겠습니까. 뭘 하며 '오래오래' 살겠습니까.

 

  자꾸 이런 말을 해대면 '재수가 없어져서' 정말로 '오래오래' 살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요즘은 "재수 없는 놈은 오래 산다"는 말도 한다는데…… 농담삼아 하는 말이지만……

 

  추신 : 오래오래 사시는 분에게는 정말로 송구스럽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이야기일 뿐입니다. 좀 젊기로니 요즘 같이 이 어려운 세상에 얘기도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널리 양해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