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下)

by 답설재 2010. 5. 4.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이한음 옮김, 김영사 2007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난번에 쓴 것처럼 다음번에는 『도킨스의 망상』 같은 책도 소개하려고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텅은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가 결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것은 유대인을 죽이지 말라는 아주 구체적인 의미였다. 그리고 ‘네 이웃’과 관련된 모든 계명들은 똑같이 배타적이다.(385)

 

유대교라는 요소를 고려 사항에서 제외시키자, 대다수 아이들은 현대인의 다수가 지닌 도덕적 판단과 일치하는 의견을 냈다. 여호수아의 행동은 야만적인 집단 학살 행위였다.(389)

 

와츠의 찬송가는 (개혁파를 제외한) 정통파 유대인과 보수파 유대인에게 암송하도록 가르치는 일일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저를 이교도로 태어나지 않게 하셨기에 찬미합니다. 저를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셨기에 찬미합니다. 저를 노예로 태어나지 않게 하셨기에 찬미합니다.”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며, 그것이 종교에 가해지는 주된 비난 중 하나다.(391~392)

 

 

<도덕적 시대정신>

 

대다수 백인들은 흑인들(아프리카와 아주 다양한 집단들뿐 아니라 별 관계도 없는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멜라네시아의 집단들이 이 범주로 묶였을 것이다)이 리듬 감각을 제외한(선심 쓰듯이 인정한다) 거의 모든 면에서 열등하다고 믿었다.(401)

 

 

<히틀러와 스탈린은 무신론자였을까?>

 

무신론자는 악한 짓을 할지 모르지만, 그때에도 무신론을 들먹이지는 않는다.(420)

 

종교 전쟁은 실제로 종교의 이름으로 하며, 역사적으로 끔찍할 만큼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무신론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이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일어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전쟁은 경제적 탐욕, 정치적 야심, 윤리적이거나 인종적 편견, 깊은 슬픔이나 복수, 국가의 운명에 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신념 등이 동기가 될 수 있다. 전쟁의 동기로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모든 이단자들과 경쟁 종교의 추종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신의 병사들은 순교자의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명확히 약속하는 경전의 뒷받침을 받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421)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종교적 주장들은 다른 모든 주장들이 거쳐야 하는 정당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배우기 때문에, 문명은 여전히 얼토당토않은 무리들에게 시달리고 있다.(421)

 

 

<위대한 베토벤 오류>

 

“임신 중절에 관해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지독한 매독 환자이고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습니다.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첫째는 맹인이었고, 둘째는 사산했고, 셋째는 농아였고, 넷째는 결핵에 걸렸지요. 당신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임신 중절을 시켰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살해한 겁니다.”(456)

 

이 어리석은 임신 중절 합법화 반대 논리에 따르면 번식 능력이 있는 개인의 성교 요구를 거절할 때마다 잠재적인 아이를 살해하는 셈이다! 심지어 강간에 저항하는 것도 잠재적인 아기를 살해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말이 난 김에 덧붙이면 임신 중절 합법화 반대 운동가들의 상당수는 야만적으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임신 중절을 하는 것까지도 반대한다).(458)

 

위대한 베토벤 오류는 우리 정신이 종교적인 절대론에 현혹될 때 빠지는 논리적 혼란의 전형적인 사례다.(459)

 

 

<온건한 신앙이 광신을 부추긴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R로 시작하는 단어(Religion 즉 종교)를 언급하는 것을 피하며, 대신 자신들의 싸움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규정짓는다. 마치 테러가 자체 의지와 정신을 갖춘 영혼이나 힘인 양 말이다. 혹은 그들은 테러리스트들의 동기가 순수한 ‘악’에서 비롯된다고 규정짓는다. …(중략)… 그들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종교의 이상주의자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선하다고 본다.(465)

 

10년 전 이븐 와라크는 걸작 《내가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유》에서 해박한 이슬람계 학자의 관점에서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468) …(중략)… “훨씬 더 많은 대다수의 이슬람교도는 현재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간다. 코란은 이것저것 뒤섞인 일종의 잡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은 평화로운 구절들을 찾아낼 수 있다. 전쟁을 원한다면 호전적인 구절들을 찾아낼 수 있다.”(469)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 - 획득하기 어렵지 않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할 때 - 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470)

 

 

<신체적 학대와 정신적 학대>

 

지옥불에 열광하는 그들은 신학자들 중 으뜸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말한 대로 자신들이 구원받았음을 아는 자가 느끼는 흡족하고 고소한 심정을 공유하는 듯하다. “성인들의 허락을 받아 지옥에서 벌 받는, 저주받은 자들을 지켜본다면 더한 행복과 신의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잘났다.(488)

 

 

<신이 만든 틈새>

 

http://www.kcl.ac.uk/kis/schools/hums/french/pgr/tqr.html를 보면 “후기구조주의 운동에 관한 문헌들 중에서 몹시 필요한 틈새를 채우는” 책이라고 적혀 있다. 이 말에 들어맞는 명백히 불필요해 보이는 책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같은, 고급 사기를 치는 프랑스 문예 운동의 거장들의 책이라니, 딱 어울리는 듯하다.(531)

 

종교는 인간 삶에서 네 가지 주요 역할을 해왔다고 여겨진다. 설명, 훈계, 위로, 영감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우리의 존재 자체와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특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역할은 현재 과학으로 전면 대체되었고, …(하략)…(531)

 

 

<상상의 친구>

 

A.A. 밀른(A.A.Milne) 재단의 허락을 받아 수록함.(534)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지 모를 존재도 아이에게는 진짜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진짜로 위로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아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상상의 친구(그리고 상상의 신)는 당사자에게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 쏟으니까. 그리고 심리치료사나 전문 상담가보다 훨씬 더 싸게 먹히니까.(535)

 

 

<위로>

 

신이 유일한 친구인, 죽어가는 환자들, 눈물짓는 유족들, 고독한 엘리너 릭비(Eleanor Rigby : 비틀스의 노래 제목)에게 무엇을 대신 제공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응답으로 가장 먼저 말할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가 위로하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539)

 

배즐 흄 추기경이 자신이 죽어간다고 말하자, 대수도원장은 기뻐했다. “축하합니다! 아주 희소식이네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었는데.” 대수도원장은 정말로 독실한 신자였던 것 같다.(545)

 

모든 기독교도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은 친구가 죽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왜 대수도원장처럼 말하지 않는 것일까? 의사가, 믿음이 독실한 여성에게 살 날이 몇 달 안 남았다고 말하면, 왜 그녀는 세이셸 제도로 휴가를 보내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기대에 차서 흥분하지 않는 것일까? “도저히 기다리지 못하겠어!” 왜 그녀의 침대 옆에 모인 독실한 문병객들은 먼저 떠난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이것저것 떠들어대지 않는 것일까? “로버츠 삼촌을 만나면 제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545)

 

어리석게 안락사나 조력 자살에 저항해야 할 쪽은 죽음을 전이가 아니라 종말로 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지지한다.(547)

 

죽은 사람이 단순히 현세에 있을 때 지은 죄를 토대로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551)

 

 

<부르카 안에서 바라본 세계>

 

오늘날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장면들 중 하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아무 모양도 없는 검은 옷으로 감싸고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는 여성의 모습이다. 부르카는 단지 여성을 억압하곡 그들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다. 남성의 지독한 잔인성과 여성의 비극적인 굴종을 가리키는 것만도 아니다. 나는 그 작은 구멍을 다른 무언가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싶다.(556)

 

과학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검은 옷이 거의 완전히 벗겨질 정도로 넓게 창문을 열어서 우리의 감각들이 상쾌하고 기분 좋은 자유를 느끼도록 해준다.(557)

 

우리가 마음 편히 상상할 수 있는 크기, 거리, 속도의 범위는 기이한 양자에서 아인슈타인의 우주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넓은 범위 중에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의 조상들에게 친숙했던 좁은 범위를 넘어서는 거리를 다루기에는 비참할 정도로 부족하다.(558)

 

뿐만 아니라 우리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의 행동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상식은 우리를 낙심시킨다. 상식은 아주 빨리 움직이는 것이 없고 아주 작거나 아주 큰 것도 없는 세계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다.(558~559)

 

다른 과학 소설가들은 우리의 신비감을 일깨우기 위해 과학의 낯설음을 활용하는 반면, 더글러스 애덤스는 우리를 웃기기 위해 그것을 이용한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무한 불가능 확률 발생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웃음은 현대 물리학의 좀더 기이한 역설들을 대할 때 유용한 반응일 수 있다. 나는 우는 것도 또 한 가지 반응이 아닐까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560)

 

생물학자 루이스 울퍼트는 현대 물리학의 기이함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는 기술과는 반대로 과학 전반이 상식에 폭력을 가한다고 본다.(562)

 

다윈은 부르카의 틈새를 움켜쥐고 억지로 열어서 현기증이 날 정도의 새로운 이해가 쏟아져 들어오도록 했고, 인간의 정신을 유례없을 정도로 고양시킬 힘을 부여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코페르니쿠스의 깨달음을 제외하면 유례가 없을 정도로.(563)

 

나라면 나는 사람들을 믿고, 사람들은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스스로 생각하도록 제대로 자극을 받았을 때 신을 버리고, 충만하고 흡족한--사실상 해방된--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아주 많을 것이라고 말하겠다.(문고판 서문, 589)

 

  

『현대문학』(2012년 3월호, 35~36쪽)에 연재된 정명환 단상 「인상과 편견」에서 다음과 같은 서평을 읽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신이라는 미망God Delusion』을 읽었다. 재미있다. 그러나 동어반복이 많아 뜨문뜨문 읽을 수도 있다. 또 무신론의 입장을 진화론에 의거해서 정당화해온 다른 많은 논자들의 입장을 답습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그런 단점과 관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널리 읽힐 수 있는 것은 많은 흥미로운 에피소드(특히 미국의 개신교 원리주의자들의 뻔뻔하고 완고한 작태들의 예시)와 저자의 매우 대담한 필치 때문일 것이다.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그가 서양의 민중을 기독교라는 미망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사명감에 가까운 포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담론은 단순한 무신론의 주장이 아니라, 개인적, 집단적으로 의식의 심층에까지 스며들어 독선과 자기검열과 방어기제에 이용되고 있는 절대적 권위의 미신에 대한 도전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라는 미신에서 해방되기가 서양인으로서는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 수 있었다. 그것은 19세기 후반기의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그리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모든 폐쇄적 관행과 심성(소박한 미신, 시멘트덩어리처럼 굳어진 유교, 소아병적인 민족주의, 타자에 대한 경계와 공포)으로부터의  탈피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연상시킬 만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기독교에 관해서 평소에 느껴온 것을 180도 뒤집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해파리떼처럼 떠다니면서, 재래적 미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가짜들과 위선자들과 사기꾼들을 기르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만일 뿌리를 단단히 내렸다면 그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 서양에서처럼 어려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선남선녀들의 의식의 장식품 정도로만, 그리고 우민들의 위안거리 정도로만 머물러 있었으면 한다.

책을 읽다가 도킨스가 인용한 재미있는 두 구절으 만났다. "한 사람이 미망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그것을 정신착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미망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그것을 종교라고 부른다."(이 구절은 피어시그의 유명한 소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 나오는 말인데, 나는 전에 그 소설을 면밀히 읽고 장문의 논문까지 쓴 일이 있는데 이 구절을 만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심한 일이다.) 또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은 세네카의 말이다. "종교는 서민에게는 진정한 것으로, 어진 사람에게는 거짓된 것으로, 통치자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2007)

 

  ───────────────

정명환 192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저서 『한국 작가와 지성』 『졸라와 자연주의』 『문학을 찾아서』 『현대의 위기와 인간』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 『문학을 생각하다』 『젊은이를 위한 문학이야기』 등. 역서 『20세기의 지적 모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

그 중에는 이 글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도 있다.

 

- 기독교도들은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신' 때문에라도 양해를 하거나 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두면 더 좋을 것이다.

- 돈이 있으면 운도 더 좋아진다.

- 문화인과 미개인의 차이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