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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中)

by 답설재 2010. 4. 28.

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옮김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김영사, 2007)

 

 

                                                      

                                                            

 

 

 

지난번에 소개한 부분의 뒷부분에서 메모한 내용들입니다.  지난번에 쓴 것처럼 다음번에는『도킨스의 망상』같은 책도 소개하려고 합니다.

 

  종교가 어디에서 왔으며 왜 모든 인류 문화가 그것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론을 갖고 있다. 종교는 위안과 평안을 제공한다. 집단에 연대감을 부여한다. 왜 우리가 존재하는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킨다. …(중략)… 종교는 너무 낭비적이고 너무 사치스럽다. 그리고 다윈적인 선택은 습관적으로 낭비를 표적으로 삼아 제거한다.(248)    진화론자에게 종교 의식은 “햇빛이 드는 숲속의 빈터에 앉아 있는 공작 수컷들처럼 돋보인다.”(데니얼 데닛의 표현이다). 종교적 행동은 개미 목욕이나 정자 짓기를 인간의 규모로 확대한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때로는 풍조의 깃털만큼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250)    종교 신앙이 스트레스와 관련된 질병들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준다는 증거가 조금 있다. …(중략)…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이렇게 말했다. “신자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은 술 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만큼이나 말이 안 된다.”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위로와 안도감이 있다.(254)    종교의 집단 선택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창의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대단히 호전적인 ‘전쟁의 신’을 섬기는 부족은 평화와 조화를 역설하는 신을 섬기는 경쟁 부족이나 신을 섬기지 않는 다른 부족과 전쟁하면 승리한다. 순교하면 곧장 낙원으로 간다고 굳게 믿는 전사들은 용감하게 싸우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259)  …(중략)…  개인의 자기희생을 설명하는 집단 선택 이론은 언제나 내부의 배신자(예 :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투에서 몸을 사린 승자)에게 취약하다. 개인의 죽음과 번식은 집단의 절멸과 분열보다 더 짧은 기간에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261) 

 

  나방들은 촛불을 향해 날아들며, 그것은 우연 같지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번제(燔祭 ; 구약시대에 하느님께 올리던 제사의 하나. 짐승을 통째로 구워 바침.)의 제물로 바친다.(263)

 

  …(중략)… 우리는 수천 마리의 나방이 달이나 별이나 먼 도시의 불빛을 향해 곧장 나아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우리의 촛불을 향해 빙빙 돌며 날아드는 나방들만을 보고서 잘못된 질문을 던진다. “왜 나방들은 자살을 하는 것일까?” …(중략)… 그들은 종교를 위해 죽거나 종교를 위해 죽인다. 우리는 나방의 ‘자기희생 행동’에 놀라는 것처럼 그것에도 놀란다.(265) …(중략)…

  아무리 과소평가한다 해도 다음과 같은 경험 법칙을 지닌 아이의 뇌는 선택적 이점이 있을 것이다. 주위 어른들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부모의 말에 따르라. 부족 원로들의 말을 따르라. 특히 그들이 엄숙하고 위협적인 어조로 말할 때는 더. 어른들이 하는 말을 의심하지 말고 따르라.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이에게 매우 유익한 규칙이다. 그러나 나방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잘못될 수 있다.(266) …(중략)…

  컴퓨터는 어떤 명령이 좋은 결과를 빚을지 나쁜 결과를 빚을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병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처럼 그저 복종할 뿐이다. 컴퓨터는 그렇게 의문을 품지 않고 복종하기 때문에 유용하며, 바로 그 때문에 바이러스와 웜 등에 어쩔 수 없이 취약하기도 하다.(269) …(중략)…

  종교 지도자들은 아이의 뇌가 취약하므로 일찌감치 교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예수회는 호언장담한다. “내게 일곱 살짜리 아이를 데려오면, 사람을 만들어주겠다.” 그것은 진부하지만 정확한 (혹은 사악한) 말이다.(270) …(중략)…

  ‘가족에 초점을(Focus on the family)' 운동을 창시한 제임스 돕슨(James Dobson)도 그 원리를 아주 잘 인식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배우는 것, 경험하는 것(그들이 듣고 생각하고 믿는 것)을 통제하는 사람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 그러나 아이의 마음이 속기 쉽다는 사실은 달이나 별을 보면서 나아가는 나방에 비유할 만한 여러 가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271)

 

    종교는 이 모듈들 중 몇 가지가 빗나간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는 모듈, 제휴를 만들어내는 모듈, 집단 내 구성원을 선호하고 이방인을 차별하는 모듈 등이 그렇다. 이중 어느 것이라도 나방의 항법에 상응하는 것 즉, 앞서 언급한, 잘 속아 넘어가는 어린아이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빗나가기 쉬울 수 있다.(274) …(중략)…

  이원론자는 마음이 몸에 깃든, 일종의 육신 없는 영혼이므로 몸을 떠나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275) …(중략)…

  천성적 이원론과 천성적 목적론은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로 향하게끔 우리에게 성향을 부여한다. 빛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나방의 특성이 의도하지 않은 ‘자살’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276) …(중략)…

  인간의 삶은 대체로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와 강화 과정을 통해 추진된다. 많은 긍정적인 강화는 종교로부터 나온다. …(중략)… 마찬가지로 실제 인물(대개 이성)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은 똑같이 강렬하면서도 긍정적인 강화를 보여준다.(283~284) …(중략)…

  빛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나방의 특성에 대비시킬 만한 것은 수많은 이성 가운데 한 명, 오직 한 명과 사랑에 빠지는,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이지만 유용한 습성이다.(285) …(중략)…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같은 인류학 저서는 인류의 비합리적인 신앙들이 대단히 다양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일단 한 문화에 잠입하면, 그것들은 생물학적 진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존속하고 분화한다.(287~288) …(중략)…

  많은 종교들은 우리의 몸이 죽어도 인격은 살아남는다는, 객관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주관적으로는 호소력이 있는 교리를 가르친다. 영생이라는 개념 자체는 갈망하는 사고와 딱 들어맞기에 살아남아 퍼진다. 그리고 갈망하는 사고는 중요하다. 인간 심리는 욕망으로 채색된 믿음을 허용하는 보편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288) 

 

  <참고> 밈meme? 예 : 당신은 죽어도 살 것이다.

 

  종이접기의 단계들은 ‘자기준거적’이다. 그 단계들이 ‘디지털’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것은 망치를 내리치는 행동의 세세한 부분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못을 끝까지 박겠다는 의도를 견습생에게 여실히 보여주는 목수와 흡사하다. 당신은 종이 접기의 각 단계를 제대로 해내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다. 반면 그림을 베끼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기술이다. 이는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기술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베끼지만 완벽하게 베끼는 사람은 없다. 또 그 정확도는 그것에 기울이는 시간과 정성에 따라 달라지며, 시간과 정성의 양은 연속적으로 변한다. 게다가 일부 집단의 구성원들은 이전의 모형을 곧이곧대로 베끼기보다는 꾸미고 ‘개선하고자’ 한다.(298) …(중략)…  종교들은 대부분 진화한다. 우리가 종교에 관해 어떤 진화 이론을 채택하든, 그 이론은 적절한 조건만 주어지면 종교가 경이로운 속도로 진화할 수 있음을 설명해야 한다.(307) 

 

  <다윈주의와 도덕의 기원>

 

  다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규명된 또 다른 유형의 이타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다(“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긁어주마”(328)

 

  자연선택은 비대칭적 필요와 기회의 관계에서 줄 수 있을 때에는 주고, 줄 수 없을 때에는 달라고 간청하는 성향을 개체에게 부여하는 유전자들을 선호한다. 또 의무를 기억하고, 원한을 품고, 교환관계를 유지하고, 받기만 하는 사기꾼을 처벌하는 경향들도 선호한다.(329)

 

  현재 우리는 개체들이 서로에게 이타적이고 관대하고 ‘도덕적’이 되려는 타당한 다윈주의적 이유를 네 가지 알고 있다. 첫째, 유전적 친족 관계라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둘째, 호혜성이 있다. 받은 호의에 보답을 하고, 보답을 ‘예견’하면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셋째, 관대하고 친절하다는 평판을 받음으로써 / 누리게 되는 다윈주의적 혜택이다. 넷째, 자하비가 옳다면 과시적 관대함은 속일 수 없는 진정한 광고의 역할을 한다.(332~333)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성(불임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 자식을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를 상대)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울먹이는 불행한 사람(친척도 아니고 보답을 받을 수도 없을 누군가)을 볼 때 어쩔 수 없이 측은지심을 느낀다. 둘 다 빗나간 사례이자 다윈주의적 실수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다.(335)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신이 세상에서 갑자가 사라진다면 우리 모두가 친절함도, 자비도, 관용도, 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도 전혀 없는 무정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려면 자긍심이 지극히 낮아야 할 듯하다.(345)

 

  아니면 비평가 H. L. 멩켄(Henry L. Mencken)이 신랄하게 비꼰 말이 옳았을까? “사람들은 실제로는 경찰이 필요할 때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347)

 

  설령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존재를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350)

 

  말기 환자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고통을 끝내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일일까? 동성끼리 사랑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일일까? 배아를 죽이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일일까?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의 근거는 절대적이다. 그들은 어떤 논증도, 논쟁도 참지 못한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쏴 죽여야 마땅하다.(352)

 

  절대론자들은 옳고 그름의 절대값들, 결과와 전혀 무관하게 옳음을 판단해야 하는 명령들이 있다고 믿는다. 결과론자들은 어떤 행위의 도덕을 결과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는, 더 실천적인 관점을 취한다.(353)

 

  직업군인이 내뱉는 “조국이 옳든 그르든”이라는 말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없을 듯하다. 그 구호는 장래 정치가들이 적이라고 부를 사람은 누구든 죽이겠다는 의미기 때문이다.(354)

 

  <구약성서>

 

  동물들이 쌍쌍이 방주에 탄다는 전설은 재미있지만, 노아 이야기에 등장하는 도덕은 끔찍하다. 신은 인간을 탐탁찮게 생각했기에 (한 가족만 빼고)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익사시켰고 덤으로 (아마도 죄가 없었을) 나머지 동물들까지 익사시켰다.(358)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 없이 이 도덕 규정이나 저 도덕 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판단의 문제다. 어느 한쪽이 ‘직감에 좌우되는 도덕’이라면 다른 한쪽도 그렇다.(358)

 

  신(혹은 지각판)이 관련된, 대규모의 지진들이 언제나 인간과 관련이 있다고 믿다니 정말로 주제넘은 자기중심주의가 아닐 수 없다. 창조와 내세를 생각하는 신성한 존재가 대체 왜 인간의 비행 같은 하찮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 인간은 자신의 하찮은 ‘죄’를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확대시키면서까지 으스대고 있다!(359)

 

  롯의 영광은 그가 거절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 때문에 흐려진다. “형제들이여, 그리 못되게 굴지 마시오. 보시오, 내게 남자를 알지 못한 딸이 둘 있소. 그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 테니 마음대로 하시오. 단 손님들은 건드리지 마시오. 그들은 내 집 지붕 아래 들어왔으니 말이오(창세기 19장 7~8절).”

 

  이 기이한 이야기가 다른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몰라도, 종교가 여성들을 어떻게 대접하는지는 확실하게 말해준다.(361~362)

 

  롯의 삼촌인 아브라함은 세 개의, ‘위대한’ 일신교의 창시자였다. 그는 족장이라는 지위 덕분에 신보다 약간 낮은 역할 모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이 그를 본받고 싶어 할까? 그의 오랜 생애에서 비교적 초기에 아브라함은 기근에서 벗어나고자 아내 사라와 함께 이집트로 갔다. 그는 아내가 이집트인들이 탐낼 만큼 아름다운 여성인지라 남편인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생략)… (364)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그런 불쾌한 일화들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는 유명한 일화에 비하면 사소한 과오에 불과하다(이슬람 경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이다.)(265)

 

  지금 내가 입증하려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경전으로부터 도덕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혹은 만일 거기에서 도덕을 이끌어낸다면, 우리는 경전에서 멋진 부분만 취사선택하고 불쾌한 부분은 거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것이 도덕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어떤 별도의 기준을 지녀야 한다. 그 기준은 어디에서 나오든 경전 자체에서 나올 수는 없으며, 우리가 종교인이든 아니든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366)

 

  여호수아가 에리코를 파괴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약속의 땅을 침략하는 과정을 담은 성경의 이야기는 히틀러의 폴란드 침략,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과 습지 아랍인 대량 학살과 도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372)

 

  신이, 약속의 땅을 빼앗을 때 자행된 집단 학살이나 대량 학살 앞에서 의구심이나 망설임ㅇ르 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정반대로 <신명기> 20장에 나온 것처럼, 신의 명령은 냉혹할 정도로 명확했다.(373)

 

  <레위기> 20장에 따르면 다음의 죄들은 죽음의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부모를 비방하는 것 불륜을 저지르는 것, 계모나 며느리와 성관계를 갖는 것, 동성애, 모녀와 동시에 혼인하는 것, 수간(그리고 그 불운한 동물도 도살한다). 물론 당신도 처형된다. 안식일에 일했다는 이유로. 그 점은 《구약성서》 전체에 되풀이해 나타난다.(373)

 

  내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드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야훼 같은 섬뜩한 역할 모델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사실이든 허구든, 그 사악한 괴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 미국에서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은 세속적인 계몽운동가들이 작성한 헌법을 토대로 그 위대한 공화국이 설립되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특히 더 안타깝다.(374)

 

  <신약성서>

 

  기독교가 이슬람교보다 더 낫고 더 부드러운 종교로 여겨지는 것처럼, 불교는 종교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난 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환생의 사다리에서 좌천된다는 내용의 불교 교리는 아주 불쾌하다.(378)

 

  원죄 자체는 구약성서의 아담과 이브 신화로부터 직접 도출된다. 그들의 죄(금지된 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는 그저 꾸지람을 듣고 끝낼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379)

 

  생각해보면 특정 종교가 고문 및 처형 기구를 신성한 상징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때로 목에 걸기도 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레니 브루스(Lenny Bruce)는 이를 제대로 꼬집었다. “만일 예수가 20년 전에 죽었다면, 카톨릭 신자들은 목에 십자가 대신 작은 전기의자를 걸고 다닐 것이다.”(379)

 

  아, 물론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그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상징적? 그렇다면 스스로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저지른 상징적인 죄를 대신 처벌받겠다고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던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지독히 불쾌할 뿐 아니라 개가 짖는 소리 같다.(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