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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Ⅴ -스완의 사랑, 스완의 음악-

by 답설재 2010. 4. 15.

하이, 코코!

다시 옮겨씁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화자(話者)의 인격을 이루는 다양한 면모가 치밀하게 소개됩니다.

 

이번에는 여성, 그리고 여성과 연계하여 음악에 대한 관점이 드러난 부분 중에서 한 부분을 옮깁니다.1 스완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하게 되었는데, 스완은-스완의 사랑은, 화자(話者), 나아가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자신의 자아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문학』 연재 제13회의 주(註)에 다음과 같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2

 

우리는 <스완의 사랑>이 화자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상감되듯 새겨져 있었다는 것, 그것은 어린 시절의 잠 못 이루는 기억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 아울러 스완이 경험한 사랑은 화자 자신의 의식 속에 '자유 연상을 통해서' 거울 속처럼 소상하게 투영된 영상이라는 것, 그리하여 여기서 스완의 경험을 통해서 처음으로 분석되고 있는 사랑과 질투는 화자 자신이 경험하는, 그리고 나아가서는 프루스트 자신이 경험한 사랑, 질투, 고통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완은 화자(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인 동시에 모델이다. 이리하여 화자는 장차 알베르틴느에 대한 비극적인 사랑과 질투의 경험을 통해서 '스완의 사랑'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랑들은 이처럼 작가가 되기 전에 먼저 "존재하는" 어떤 인물의 불수의 기억 속에 강박적으로 남아 있다가 소설 속에서 예술적 계기와 형식을 빌려 되살아난다.

 

이 부분을 옮겨쓴 것은, 사실은 이번에 소개하는 부분(여성 및 음악에 대한 관점의 일부)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는 점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 마르셀 프루스트의 여성, 음악을 보는 관점이니 재미있겠구나!'라는 얘기죠.

 

 

…(전략)…

그러나 스완은, 만일 자기가 오데트에게 (오로지 저녁식사 후에만 만나겠다고 하여) 그녀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해도 당분간은 자기에 대한 그녀의 호감이 물려버릴 정도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 그는 오데트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무렵에 반해 있던 장미꽃처럼 싱싱하고 오동통한 여공 아가씨의 아름다움이 훨씬 더 좋았고, 또 오데트는 나중에 만나게 될 것이 확실하므로 초저녁은 그 아가씨와 함께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오데트가 베르뒤랭네에 함께 가려고 그를 데리러 오는 것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공 아가씨는 스완의 마부 레미가 잘 알고 있는 그의 집 근처 길모퉁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스완 옆자리에 올라타고 마차가 베르뒤렝네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줄곧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가 들어가면 베르뒤렝 부인이 그가 아침에 보낸 장미꽃을 가리켜 보이면서 "당신을 좀 꾸짖어야겠어요." 하면서 하면서 오데트의 옆자리를 가리키는데, 한편 피아니스트는 그들 두 사람을 위하여 그들의 사랑의 국가國歌라고 할 벵퇴유의 소악절을 연주했다. 그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 지속부에서부터 연주를 시작했는데, 몇 소절 전체에 걸쳐 그 소리만이 전경을 다 차지하며 들리다가 갑자기 그 트레몰로가 옆으로 물러서는 듯하더니, 피터르 더 호흐3의 그림에서처럼 살짝 열린 문의 좁은 문틈으로 인하여 깊숙한 원경이 생기면서, 아주 멀리서, 벨벳처럼 부드럽게 비쳐드는 빛 속에서 어떤 다른 색조를 띠며, 그 소악절이 춤을 추듯, 목가풍으로, 중간에 끼워넣은 삽화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인 양 나타났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다할 길 없는 기복을 그려 보이면서 한결같고 형언할 길 없는 미소와 함께 여기저기에 그 우아함을 뿌리며 지나갔다. 그러나 스완은 이제 거기에서 환멸의 기색이 드러나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악절은, 스스로 행복의 길을 보여주면서도 그 행복의 덧없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경쾌한 우아함 속에 그 악절은 회한 뒤에 오는 초연함과 같은 완결된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스완으로서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 악절을 그 자체―이를테면, 그것을 작곡했을 때 스완과 오데트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한 작곡가와 몇 세기가 지난 후 그 곡을 듣게 될 모든 이들에게 그 악절이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로 보기보다는 베르뒤랭 부부나 젊은 피아니스트에게까지도 스완과 오데트를 동시에 생각나게 하는, 그래서 그들을 맺어주는 사랑의 정표, 사랑의 기념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그가 여전히 그 소악절밖에 들어보지 못한 터인 그 소나타의 전곡을 어느 음악가에게 연주시켜보겠다는 계획마저, 오데트가 변덕을 부려 간청하는 바람에, 단념해버릴 정도였다. "그밖에 뭐가 더 필요하죠? 그것이 곧 우리의 곡인걸요." 하고 오데트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악절이 아주 가까이에서, 그러면서도 한없이 멀리서 흘러가는 순간, 그들을 향한 것이긴 하면서도 그것이 그들을 알지도 못한 채 지나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지는 스완은 그 악절이 어떤 의미를, 그들과는 무관한 어떤 본질적이고 고정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유감이라는 느낌마저 받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보석을 받거나 사랑하는 여인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것이 순전히 어떤 덧없는 인연이나 한 존재의 정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 보석의 광택과 글월에 쓰인 낱말이 원망스럽게 느껴지듯이.

…(후략)…

 

 

코코.

다음 표현도 눈여겨봤습니다.

 

"피터르 더 호흐의 그림에서처럼 살짝 열린 문의 좁은 문틈으로 인하여 깊숙한 원경이 생기면서, 아주 멀리서, 벨벳처럼 부드럽게 비쳐드는 빛 속에서 어떤 다른 색조를 띠며, 그 소악절이 춤을 추듯, 목가풍으로, 중간에 끼워넣은 삽화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인 양 나타났다."

 

어느 미술 선생님이 피터르 더 호흐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까페 『기북 상옥에서의 추억』(http://cafe.daum.net/gs-art)에서 다음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살짝 열린 문의 좁은 문틈으로 인하여 깊숙한 원경이 생기면서, 아주 멀리서, 벨벳처럼 부드럽게 비쳐드는 빛 속에서 어떤 다른 색조를 띄며, 그 소악절이 춤을 추듯, 목가풍으로, 중간에 끼워넣은 삽화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인 양 나타났다"는 표현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테이블의 카드 플레이어』

 

 

『편지를 읽고 있는 여인』

 

 

 

코코.

마르셀 프루스트의 표현에 따라 이 그림들을 살펴보며 저 열린 문의 저 쪽, 혹은 창문 너머에는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다른 세상…… 그렇죠. 다른 세상이 있겠지요. 틀림없이.

봄, 저 햇살이, 다시 피어나는 저 잎새와 꽃잎들이, 거리의 저 활기찬 사람들이, 더구나 여인들의 모습이, 저렇게 찬란하다는 것이, 내게는 형벌과 같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부디 좋은 날들을 맞이하기 바랍니다.

 

 

2010년 4월 15일, 이 봄, 눈부신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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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문학』2010년 2월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연재 제14회(225~248 중 240~241쪽.『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스완의 집 쪽으로」는 1) '콩브레' 2) '스완의 사랑' 3) '고장의 이름 : 이름', 이렇게 3부로 나뉘어져 있고, 이 인용은 2) '스완의 사랑'의 일부임.
2. 『현대문학』2010년 1월호(339쪽),『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연재 제13회, 주 1)의 부분.
3. 피터르 더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 : 네덜란드 화가. 특히 1654-1662년, 델프트에서 정착했던 시절, 시적인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실내풍경을 많이 그렸다. 열려 있는 좁은 문틈으로 외부의 빛이 들어오고 문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실내의 어둑한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는 그림들이 많다.『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릭 카펠리스 엮음, 이형식 옮김, 까치글방), 49면 도판 참조(현대문학 연재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