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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와리스 다리 『사막의 꽃』

by 답설재 2010. 5. 3.

와리스 다리 『사막의 꽃』

이다희 옮김, 섬앤섬 2005

 

 

 

새 영화 <데저트 플라워(Desert Flower 사막의 꽃)>를 소개하는 기사를 봤습니다.

어느 대학생이 그랬습니다. "초록 아파트, 은별 아파트… 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촌스러운가요?"

새 영화 소개란의 <데저트 플라워>는 다음과 같았습니다(조선일보, 2010년 4월 22일, A25면,「소말리아 출신 톱모델 비인간적 '할례' 고발」)

 

소말리아 황무지 마을에서 태어난 와리스 다리(리야 케베데)는 열세살 때 동네 노인과의 강제결혼을 피해 고향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 런던까지 간 그녀는 햄버거집에서 일하다가 유명 사진작가 눈에 띄어 모델로 데뷔한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그녀는 불법체류 적발과 위장결혼을 겪으며 세계 최고의 패션리더로 성장한다. 그녀는 유엔본부에 나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소말리아 여성의 비인간적인 전통을 고발한다.

이 영화는 실제 1990년대 톱 모델로 활약했던 와리스 다리의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그녀를 연기한 리야 케베데 역시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현재 활동 중인 모델이다.

  …(중략)…

마른 흙바닥에 세운 움집에서 태어나 자라며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다리가 런던으로 건너가 자아를 찾게 될 때까지, 관객들은 그녀의 삶과 자신의 삶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 고통스러워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아프리카 여자 아이가 세계 유명 패션잡지 커버를 장식하는 톱 모델이 된 과정을 보며, 그녀를 "몸매 하나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후략)…

 

 

 

 

 

            

 

와리스 다리가 '유엔본부에 나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비인간적 전통을 고발했다'는 이야기는,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 지역에서 '종교적 신념'으로 현재도 매일 6000명의 소녀를 대상으로 생식기 외부를 잘라내는 이른바 '할례'를 말합니다.

 

와리스 다리도 겨우 다섯 살 때에 동네 할머니 손으로 할례를 당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 할머니의 무지막지한 '수술'이 부디 성공하기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와리스 다리는 그 경험으로 '모든 여성은 할례를 한다'는 그야말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채 런던으로 건너가 룸메이트 덕분에 자신이 쓸데없는 전통의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세계적 스타가 되어 그 종교의 힘을 외면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을 때 세상을 향해 그 사실을 고발하게 됩니다.

 

영화에는 그런 장면도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와리스 다리, 그녀가 직접 쓴 책 『사막의 꽃』에서는 그녀가 007 영화에서 '본드 걸'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해줍니다.

한때는 007은 빼놓지 않고 봤습니다. 어느 영화였는지, 화면이 열리자마자 본드가 붙잡혀 어느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천정에서 몇 명의 본드 걸들이 맑고 아늑한 분위기의 거대한 욕조 속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던 장면. 그 여성들 중에 이른바 '미끈하게 빠진' 와리스 다리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007은 1967년부턴가 보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그런 유의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와도 그 추억 때문인지 꼭 찾게 되는 그 영화 "007".

 

 

 

 

 

영화가 나왔는데도 『책 읽어주는 남자』 처럼 책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쑥스럽습니다. 영화가 책보다 더 좋다는 주장을 힌다면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 영화가 나올 줄 알았겠습니까?"

책을 사서 보면, 돈도 좀 더 들고, 그걸 읽자면 시간도 몇 배가 더 걸리긴 합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책을 읽는 일이 한심해집니다. 그런데도 읽고 또 읽는 것이 책입니다.

 

학자들은 "'사막의 꽃'? 그게 무슨 책이냐?" "그것도 책이냐?" 하겠지요? 아니, 아예 말을 하지 않겠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독서노트>에 그 동네 할머니가 겨우 깨어진 그릇 조각과 바느질하는 실 오라기를 가지고 와리스 다리에게 할례를 행하는 장면을 옮겨놓을 걸 그랬습니다. 유감이지만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독서노트>에 그 장면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나도 남성이긴 하지만 -참 무지막지한 짓을 해대는 쪽이 남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함께 어울어져 살면서 여성들이 이를 갈아붙이며 대어들 만한 일들을 기억해두기는 싫고, 그런 장면은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할례하는 장면을 옮겨 놓다니, 어디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페미니즘? 어쨌든 이 소설 혹은 이 영화를 매개로 하여 "얘들(남성들)아, 좀 봐라!" 열변을 토하고 싶은 여성이라면, 흑인 여성 와리스 다리에게서 남성을 능가하는 '강렬하고 강인한 힘' '원시림과 사막의 광활한 땅 아프리카 같은 여성의 힘' '그 아프리카의 날렵하고 사나운 맹수 같은 여성의 힘'……을 보고 싶어할 것 같습니다. 남성들을, 그까짓 놈들을, 얼마든지 때려눕힐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한다 해도 할 말도 없는 것이 '할례'와 그 유사한 짓들을 해온 남성이긴 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와리스 다리의 책 『사막의 꽃』에서 다음과 같은, 와리스 다리가 살아가는, 아니, 잘 살아가고 싶어한 장면 중에서 몇 군데만 옮겨놓았습니다. 이런 장면들조차 그 <이를 갈아붙이는 분들>이 읽으면 "다 남성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한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습니다.

 

서툰 영어와 몸짓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은 더 긴 것, 또는 더 짧은 것, 더 달라붙는 것, 더 밝은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탈의실 밖에 수십여 벌의 옷이 쌓이고, 옷 입어보기 마라톤이 마침내 끝나자 점원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걸로 결정하셨어요?"

하나만 선택하기엔 옷이 너무 많기도 했지만 그 때쯤 되자 나는 좀 더 가면 다른 가게에 더 나은 옷이 있지 않을까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귀중한 돈과 이별하기 전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오늘은 아무 것도 안 살래요."

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고마웠어요."

불쌍한 점원들은 한 아름이나 되는 옷을 들고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가 서로를 쳐다보며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181)

 

"또 왔구나. 이리 와라. 네 이름이 뭐니?"

그 때부터 테렌스 도노반은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대해주었다. 자식을 둔 아버지인 테렌스 도노반은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겁 많은 어린아이라는 걸 알았다. 테렌스는 차를 갖다주고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의 사진이었다.

"자, 이제 다른 사진을 보여줄게. 날 따라와."

테렌스는 선반과 서랍장으로 꽉 차 있는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달력이 놓여 있었다. 테렌스가 페이지를 넘기자 각 페이지에는 매달 다른 여자들의 사진이 있었다. 모두 숨 막히게 눈부신 여자들이었다.

"봤지? 작년에 나온 피렐리 달력이야. 매년 이렇게 찍지. 하지만 올해는 달라. 아프리카 여자들만 찍을 거야. 어떤 사진은 옷을 입고 찍겠지만 어떤 사진은 안 입고 찍을 수도 있어."(207)

그 사이, 빨리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한 일자리에 너무 집착하거나, 진심으로 원하던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고 속상해 하거나, 좋아하는 디자이너에게 거부당했다고 상처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자리를 얻었을까? 얻을 수 있을까? 왜 안 됐지?"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미쳐버리기 십상이다. 특히 일을 따내지 못했을 때는 더하다.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면 얼마 가지 않아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결국 깨닫게 되는 사실은 대부분의 캐스팅 결과는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이렇게 걱정하곤 했다. "왜 그 자리를 못 얻었지? 정말 원하던 일이었는데!" 그러나 나중에는, 모델 일에 관한 한 나만의 좌우명을 갖게 되었다. C' est la vie(인생은 다 그런 것). 잘 안 된 것은, 잘 안 된 것이다. 고객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뿐이지 내 잘못은 아니다. 고객이 찾는 것이 키 2미터에 긴 금발머리를 한 몸무게 40킬로그램짜리 모델이라면 와리스에게 관심이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잊어버려야 한다.(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