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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어느 학부모의 작별편지Ⅱ

by 답설재 2010. 2. 23.

교육경력 41년의 마지막 한 주일 중 화요일이 가고 있습니다.

 

오전에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 이사회에 나갔고, 오후에는 그 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 『교과서연구』지 편집기획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그 위원회는 제가 위원장입니다.

아직은 교장이니까 '출장'이고 이런 출장은 '여비 기권'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교육부 직원이나 대학교수, 연구기관 학자 등 여러 사람들이 "교장선생님" "교장선생님" 하고 불러도 아직은 어색하지 않지만, 며칠 후면 당장 달라질 것입니다. 아직도 저를 보고 옛날처럼 "과장님" 혹은 "장학관님" 하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색한 것은 당연합니다.

 

쑥스러운 편지를 한 번 더 소개합니다. 이런 소개도 이제 앞으로는 없을 것입니다.

 

 

교장선생님께

 

 

안녕하세요. 학부모 대표 ○○○입니다.

누구도 저를 대표로 내세워주지는 않았지만, 교장선생님을 교육 일선에서 보내야 하는 많은 학부모님들의 아쉬운 마음을 잘 알기에 스스로 이렇게 칭하겠습니다.

상장이나 감사장 문구, 문장부호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시는 분이라 편지를 올리기에 무척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교장선생님과 아이들이 헤어지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져 교과서적인 문장, 문장부호, 띄어쓰기에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용기내어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위로 두 아이를 이 학교에서 졸업시켰고, 며칠 전 막내아이의 졸업을 맞이했습니다. 그날은 제가 졸업하는 것처럼 설레었지만, 환후의 피로감이 역력한 교장 선생님꼐서 아이들 한 명 한 명 손을 잡아주시던 그 모습에 가슴 적시는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블로그의 글에서 '영등포역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셨는데, 그 여인은 아이 뒤에서 활짝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졸업식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래관 실내가 교장선생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맴돌고 있었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우리 학교로 부임하셨을 때도 '그렇고 그런 분이겠지' 했습니다. '그렇고 그런 분'이란, 지금 생각하면 '여느 교장선생님처럼 권위적이어서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께서 오셨을 때 아이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학교에서 자주 뵙게 되는데, 자상하게 건네시는 말씀이 기분좋고 으쓱해지게 만들어 교장선생님을 자주 뵙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학부모총회가 열리는 날, 우리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차를 마셔보았습니다. 그 많은 학부모들을 위해 미래관에 따뜻한 차를 준비해주셨는데 학부모들은 '대접 받는다'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높게만 느껴졌던 학교 문턱이 낮아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수년간 학부모회 활동을 해왔지만 예전과는 달리 학부모와 선생님들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생겨났습니다. 열린교육이 이루어지려면 학부모와 선생님들간의 관계가 적절한 거리는 있되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인사말씀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으면 교내에서는 모두 내 자식이므로 어머니들께서 학교에 와서는 아이들을 꾸중하지 마세요. 그런 모습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령 빠트린 준비물을 챙겨다 주면서 아이를 혼내지 마세요. 챙겨주지 않는 것이 옳기도 합니다."

다 맞는 말씀이지만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야단을 치시니 '참 독특한 분이 오셨구나' 했습니다.

 

제가 단체장을 맡아 몇 번이나 교장실을 드나들며 얼굴을 익혔는데도 교장선생님께서는 제 아이와 저의 관계를 모르고 계셨습니다. 활동하는 어머니들의 아이를 알게 되면 그 아이를 편애하게 될까봐 알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씀을 전해듣고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학교장칼럼'을 자주 읽게 되었는데, 교장선생님의 교육관이 그대로 느껴져 공감하고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프로필의 수상경력에도 "저 상 좀 주십시오" 해서 받은 상은 없다고 하셔서 미소짓게 하는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독서에 관한 글에서는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범죄"라고 하신 대목을 보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인 저에게도 따끔한 일깨움을 주셨습니다.

 

저는 교육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초등교육은 어느 시기의 교육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의 교육과정 개정을 거치면서 변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주입식 교육이 비일비재하고 평가에 있어서도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들이 바뀌어야 교육이 바뀔 것인데 그 역할을 너무도 잘 아시는 교장선생님께서 아이들 곁으로 더 일찍 오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많이 혹은 귀신 같이 설명해주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계획·실천·평가하면서 사고력, 창의력, 자기주도력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 백 배는 더 중요하다"라는 신념을 가지신 교장선생님께서 아이들 곁을 떠나시니 참 안타깝습니다.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보시며 예뻐서 어쩔줄 몰라 하시던 그 표정, 그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교장선생님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저는 교육계의 보물을 만난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뒤늦게 발굴된 유물이 현세에 그 가치와 예술성이 빛나 우리가 아끼고 보존에 정성을 기울이듯이 교장선생님께서 교육의 변화에 쏟으신 열정과 노력은 분명 보이지 않는 큰 작용으로 현재의 선생님들과 아이들, 그리고 미래로 고스란히 연결되리라 믿습니다. 많은 학부모들 마음 한켠에는 늘 빛나는 보물! ○○○ 교장선생님이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은 정말로 독특한 분이 맞습니다. 개학 후, 방학 중 교장선생님의 심장 수술 소식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제 수확을 거둔 농부의 마음으로 편히 쉬십시오.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던 마음만큼 지금부터는 당신만을 사랑하시어 건강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또다른 농사로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더라도 묻어 두시고 지금은 당신만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교장선생님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0년 2월 17일

   

                                                                                                                   '학부모 대표'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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