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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

어느 교사 며느리의 설날

by 답설재 2010. 2. 19.

 

 

 

 

 

설 쇠고 왔습니다.

선생님 메일을 지금에야 확인했는데,

선생님 뜻을 거스르지는 않은 설을 지내고 와서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이래저래 서운하고 힘들고 속상한 것들…….

다 속에 묻고 입을 잠그고 약간 가식적이나마 웃음도 띄우며,

그렇게 가족들에게 필요한 사람 역할을 하고 왔습니다.

제 진심은 그다지 기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이니까 탁 깨놓고 말해서 말이에요.

나는 상대를 배려해서 사는데,

상대는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저를

우습게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전 사촌들과 고샅길을 누비며 뛰어다니던

그 명절의 기분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입니다.

서글퍼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명절이란…….

나탈리 골드버그라는 사람이 쓴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오늘 문득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독감에 진저리치다가,

도저히 잠들 수가 없어서

뭐라도 끼적거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스스 일어나서는

그만 선생님 블로그에 들르고, 이 메일을 쓰게 되었어요.

인간에 기대고, 또 그러다 실망하고 하는 일이

이토록 뼈저린 고독감과 상실감을 줄 수도 있는데

바보같이 왜 자꾸만 저는 그 사실을 잊는 걸까요.

공지영의『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고 했던 소설 제목은

아마도 저 보라고 붙인 게 아닐까요.

 

뜬금없지만,

선생님 퇴임식은 또 왜 안하셨어요?

선생님은 왜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혼자

가고 계신건가요?

아니,

선생님은 덜 고독할 수 있는

지름길을 알고 계셔서 그렇게 하신 건지도 모르지요.

저 NAVER 그림의 끝도 없는 길을 걷듯

이 초라한 길을 언제까지 걸어가 보면,

덜 고독한 순간이 올까요.

아니면 저라는 인간 자체가 고독 덩어리여서

하얀 뼛가루가 되어 날려가 버리기 전까지는

도무지 햇살 쬐여들 틈새조차 없는 게 제 인생일까요.

 

선생님.

일기장에 제 마음을

피토하여 뱉어내듯이 적어놓고서야

겨우 자신을 어루만지며 진정시키곤 하던 제가,

지금은 이렇게 선생님께

하소연 다 한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요.

공허하게 울려 퍼져나가는

혼자 울음이 아니라,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

저를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응석부리고 투정부릴 수 있다는 것,

제 인생에 일어난 몇 안 되는 기적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선생님께 속을 다 드러내놓을 수 있고 보니까,

새삼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정말로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 합니다.

오래 제 곁에 계셔 주세요, 부디.

선생님께서 미리 보내신 메일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적으신 걸 보고,

왜 저만 그래야 하냐고

따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한 꾸중을 하셔도

잘 들을게요. 그렇게 노력할게요.

말씀 잘 들을게요.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만

보내주세요.

제가 평균 이하의 인간이 아니라는 위로를

해 주세요.

제가 그다지 나쁜 인간은 아니라는

선언을 해 주세요.

선생님, 제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세요.

제겐 선생님이 있어요.

 

 

 

<답장의 요지>

 

네가 아직 어리구나.

남들이 왜 너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하니?

너는 지금까지 뭘 보고 읽고 생각하며 살아왔니? 겨우 그런 것이나 바라며 보고 읽고 생각하고 그랬니?

네 마음이 상했다면, 네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들과 네가 무엇이 다르겠니?

그런 생각을 하는 너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너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겠니?

 

그리고

사실은 나도 고독하단다.

 

덧붙이면,

날 잊고 싶거나 잊어야 하는 사람들은 '퇴임식'이라는 걸 하자고 했단다.

 

네가 나보다 어리다 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