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969년에 발령을 받아 가르친 교육과정은 나중에 알고 보니 제2차 교육과정이었습니다. 교원들이 보는 각종 시험문제에도 자주 출제된 내용은, 그 교육과정은 존 듀이의 철학을 반영한 이른바 '생활(경험)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것이었는데 다 쓸데없는 허접쓰레기 지식이지요.
당시에는 '교육과정'이라는 문서를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어쩌다가 공개수업이라는 걸 하게 되면 '지도조언' 시간에 교감이나 교장이 그 책자의 표지를 보여주며 "이런 게 있다. 당신의 수업은 이 문서에 적힌 내용을 보면 다 엉터리다" 그렇게 으스대기나 하는데 필요한 문서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도 평소에는 펴본 적이 없는 책자라는 걸 당장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 2월 14일에 제3차 교육과정이 개정 공포되고1 그해 3월부터 초등학교 1~3학년에 당장 적용하게 되자, 교육과정 전달연수라는 걸 대대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여러 날 50리나 떨어진 읍내 교육청에 나가서 연수를 받았는데, 그게 60시간이었는지 120시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똑똑한 강사들의 설명을 듣고 '아, 인공위성이라는 걸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쏘아올렸구나!' 했습니다. 강사들은 "앞으로는 지식의 구조, 기본개념과 원리를 중시하는 학문중심 교육과정을 적용한다. 지식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개념과 그 관계를 이해하고 지적(知的)인 탐구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지도내용을 정선해야 한다"고 누누히 설명했고, 함께 브루너, 발견학습…… 등 꽤 유식한 설명도 많이 들었습니다.
좀 지루하겠지만『제7차 교육과정 해설』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2
제3차 교육과정에서는 제2차 교육과정에서의 생활중심 교육과정을 지양하고 학문중심 교육과정을 강조하였다. 학문중심 교육과정 사조에 의하면, 교육과정은 '각 학문에 내재해 있는 지식 탐구 과정의 조직'으로 정의된다. 이 과정을 강력히 주장한 브루너(Bruner, J. S.)에 따르면, 교육과정은 곧 '각 교과의 전문가들이 각 교과가 나타내고 있는 지식의 본질(구조)을 가장 명백히 표현할 수 있도록 그 지식을 체계적으로 조직해 놓은 것'을 가리킨다.
이 '지식의 구조'를 문제로 삼는 학문중심 교육과정이 나타난 동기를 미국에서의 스푸트닉 충격에 의한 생활 또는 경험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반성으로 보기도 하고, 지식 및 정보의 폭발적인 팽창에 따르는 교육내용의 선정 문제를 들기도 하며, 교과를 잘 가르치기 위한 탐색적 노력의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도 학생의 자발적인 탐구를 통한 지식의 이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경험중심 교육과정의 개념을 보다 엄밀하게 구체화하고 있으며, 지식의 탐구 과정은 학생 경험의 총체 중의 특수한 부분을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 경험중심 교육과정과 정면으로 대립되지는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보다는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대비한 해결력을 기르고자 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으로서의 성격은, 교육과정의 기본 방침 중 '지식·기술 교육의 쇄신'이라는 항목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교과는 수학, 과학, 사회 등이었다.
그러다가 제5차 교육과정에 따른 사회과 교과서 재판 발행 업무와 제6차 사회과 교육과정 심의 등에 참여한 일이 계기가 되어 교육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또 그러다가 제7차 교육과정 개정을 거쳐 적용기에는 주제넘게도 초·중·고 전체의 교육과정, 교과서 등의 정책을 총괄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 어디서도 그 직책을 제가 맡겠다고 은밀하게 부탁하고 다닌 적은 없었습니다. 그야 장·차관의 고유 권한 아닙니까. 고유 권한이라면 당사자가 나서서 "제가 하겠습니다" 하는 건 정말로 주제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얘기는 그만두고 교육과정 전달연수 얘기만 하겠습니다. 저는 몇 시간짜리 연수는 시키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사정이 안 되면 하루짜리 연수를 진행했지만, 적어도 1박2일, 가능하면 2박3일짜리 연수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밤에도 -술 한 잔 하고서도- 교육과정 얘기로 밤을 새우는 그런 연수가 되게 하고 -정작 저 자신은 초저녁부터 골아떨어져서 걸핏하면 "그만 좀 자라!"고 소리나 쳤지만- 전국에서 모인 전문직, 교원대표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고 정을 쌓아가고 자부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당시에 그런 연수에 참여한 분이 주위에 있으면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또 있습니다. 연수는 일방적인 강의로만 채우지 않고 -좀 눈에 거슬리는 용어를 쓰는 걸 양해해주십시오- 꼭 Action Plan을 마련하는 Workshop을 하게 했고, 시·도에 돌아가서도 그렇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요즘은 일방적, 획일적 강의 일변도의 연수를 진행하면서도 그 연수 형태의 이름만 빌려서 걸핏하면 "웍숍, 웍숍" 하는데 참 가소로운 일입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을 지나서 이제 곧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른바 '미래형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교육과정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교육과정 전달연수를 받으러 다녀야 합니다. 어떤 형태의 연수가 될지 기대와 함께 걱정도 됩니다.
다른 걱정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그런 전달연수 내용을 다시 전달하며 축소하고 또 축소해서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들어보면 교육과학기술부 연수는 하루, 시·도 혹은 시·군 단위 연수는 몇 시간, 학교단위 연수는 교과목별로 10~20분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거꾸로'가 아닙니까? 교과부 연수는 몇 시간이더라도 현장 적용을 위한 연수라면 그 몇 배로 이루어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기야 저는 교원대학교 종합연수원의 교장자격연수, 혹 시·도, 시·군 교육청 연수에 초청되어 90분이나 3시간까지의 강의를 곧잘 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학교에서는 1년이 가도 강의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으니 -선생님들이 그토록 분주하시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바쁘다는 사람들 붙잡고 이야기하기는 절대로 싫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가 책임지는 학교에서조차 강의 한번 하지 못하는 것도 참 딱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분주한 선생님들을 하필이면 교장인 제가 나서서 더 바쁘게 한다는 건 더 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스템을 고쳐야 합니다. 어떻게든 고쳐야 합니다. 누가 고치든 고쳐야 합니다.
1. 이때까지만 교육과정이 개정되면 '공포'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이후로는 '고시'가 되었습니다. '고시'는 '공포'보다는 낮은 수준입니다.
2. 교육부(1998),『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1) : 총론』45~46쪽. ※ 집필자 : 이경환·김만곤·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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