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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쓸쓸한 ‘교과서의 날’

by 답설재 2009. 10. 5.

쓸쓸한 교과서의 날

- 최영복 선생님께 -

 

 

모자를 쓴 이가 최영복 선생님(2009년 10월 2일)

 

 

정말이지 지금부터라도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또 했습니다. 지난 9월 28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였습니다. 제4회 교과서의 날 심포지엄인가 뭔가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다가 로비에서 선배들을 전송하고 가려고 한 게 잘못되었을까요. 내친 길에 마당에 나가 담배 한 대를 피고 가자고 생각한 것이 잘못되었을까요.

 

최영복 선생님께서 꾸부정한 모습으로 혼자 한길로 나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분은 제1차 교육과정기에 문교부 수석편수관으로 근무한, 가물가물한 대선배입니다. 버스나 택시를 타시려는지 그렇게 한길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초라하구나.’ 했습니다. 제가 승용차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었을까요? -사실은 저도 곧 승용차를 가지고 다니지 못할 연령이 될 것입니다- 그분이 대선배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초라해보이게 했을 것입니다.

 

후회는 오랜 시간 후에 오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차를 몰고 나서는 순간 뇌리를 스쳤고, 점점 강하게 몰려왔습니다. ‘댁이 어느 방향인지 물어볼 걸 그랬나?’ ‘서울시내에서 댁까지 모셔드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택시라도 태워드릴 수 있지 않았나?’

 

아침부터 종일 자리를 지키다가 혼자서 돌아가며 얼마나 쓸쓸하고 힘들었겠습니까. 교육부에서 나온 지 만 5년밖에 되지 않은 제가 ‘요즘은 전관예우라는 것도 전혀 없나?’ ‘그것도 정부관리였다고, 권력이라는 게 이렇게 무상한가?’ 싶은데, 그분은 무려 40년간 오죽하겠습니까? 저 같은 속물(俗物)과 달라서 그런 생각 전혀 하지 않고 우리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행사에 순전히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만으로 참석하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싶었습니다.

 

그런 상념은 그날 그 행사의 분위기가 참으로 스산해서 더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노인들의 친목모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전의 기념식 참석자들도 대부분 정년퇴임한 노인들이었고, 오후의 심포지엄 참석자들 중에서는 아직 현직인 사람은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혀 없었습니다. 내용이 참고가 될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정부 공무원도 당연한듯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그들만의 잔치’라고 비하할 만한 수준조차 아니었습니다.

 

사실이지, 이 블로그의 그 행사 스케치에는 너무 부끄러워서 오후의 심포지엄 때 객석이 텅 빈 모습을 찍은 사진을 싣지 못하고, 오전의 기념식 때 찍은 객석 사진을 실었습니다(「교과서의날 심포지엄」(2009. 9. 30). 우리는 그렇게 텅 빈 방에서 발표하고 토론했습니다. 저만 해도 제 토론에 터무니없는 열을 올렸습니다. 사실은 저뿐이 아니었습니다. 편수국 부활 혹은 편수청 신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분은 함수곤 전 편수국장이었고, 토론자 중에서 열을 올린 분은 정완호 전 한국교원대학교총장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쓸쓸했는가 하면, 잠깐 틈을 내어 달려온 종합토론 사회자 권영민 연구관이 이튿날의 교육과정 공청회 준비로 마음이 바빠서 얼른 마치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딱 두 분이 질의를 했고, 그나마 저의 주장이 관련되는 ‘참고서가 필요 없는 교과서’에 대한 질의는 참고서가 필요하다는 건지 참고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건지조차 도무지 분명하지 않은 질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무슨 대단한 심포지엄에 나온 토론자인양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참 딱한 분위기여서 들을 대상도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듯, 지금 그 주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이 나라 교육이 무너지기라도 하겠다는 듯, 할 말은 다함으로써 애써 그 분위기를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교육과정 기준'이 있다면, 학습자료에 대해서까지 정부에서 이건 쓰고, 저건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지나친 규제이다. 더구나,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관한규정'에서 꼭 국․검․인정 교과서를 써야 한다고 강력하게 규제하는 상황이므로 학습자료조차 규제하는 것은 지나치다.

- '참고서'에 대한 개념규정도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라는 것이나 디지털 자료는 써도 되고 종이로 된 자료는 안 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교과서에 대해 '교육과정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주된 자료'라고 규정한 개념에서 '주된'이란 '부수적인' '보조적인' 자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 물론, 정부에서 '참고서가 필요없는 교과서'를 만들고자 하는 충정은 이해한다.

 

이야기가 좀 벗어났지만, 최영복 선생님께서는 그렇거나말거나 우리의 이야기를 끝가지 다 듣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때 초․중․고 교육과정․교과서․역사 정책을 총괄하던 제가 그분의 심정과 입장을 모른 체한다면, 그러면서도 후배들이 무성의하다는 걸 이야기한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자신은 틀려먹은 인간이 어떻게 후배들의 잘못을 지적하겠습니까.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분은 1957년부터 1970년까지 과학과 편수관, 수석 편수관을 지낸 분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그 1차 교육과정기(1954~1963) 때입니다. 처음에는 상업 편수를 담당하다가 후에는 과학 편수관을 겸했습니다. 지금의 교육과정심의회가 운영위원회, 학교별 위원회, 교과별 위원회로 구성․운영되는 것도 벌써 그때 시작된 일입니다. 그분은 편수국에서 4․19와 5․16을 겪었고, 문희석 해병 대령이 장관으로 취임하여 편수관과 과장급(서기관) 이상은 모두 사표를 내게 되었을 때 충북 영동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편수관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다시 복직한 분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1

 

“문교부 직제에서 ‘편수국’이란 석 자와 ‘편수관’이란 직종이 사라진 이때, 편수국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과거를 회상해보니 자화자찬 같지만 ‘편수국’이란 존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중차대했고, 편수관들은 건국 초기의 혼란, 4․19, 5․16 등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명감에 불타 앞을 내다보고 협조하여 임무를 잘 완수했다고 새삼스럽게 생각된다.

 

첫째, 국가는, 1945년 12월 군정청 학무국이 재조정되었을 때 편수과(정부 수립 후 편수국으로 개편)를 제일 먼저 제시할 정도로 교수요목 제정과 교과서 편찬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둘째, 최현배, 장지영, 이병기 씨 등 당시 학계에서 인정받던 권위자 또는 교과교육 전문가가 사명감을 가지고 대거 참여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타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입장에서 군정 3년에 임시 교수요목을 제정하고 교과서 수십 책(임시 및 교수용 포함)을 편찬 발행했다.

셋째, 편수관들은 각자 권위와 전문성을 살려 책무를 수행하면서도 편수국(주체는 편수관실)2)이라는 공동체를 잘 운영하여 자유당, 민주당, 군사 정권하에서도 편수국을 독립시키고 그 권위를 유지해 왔다.”

 

“최영복 선배님.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행사 때만 잠깐씩 인사 올려 잘 모르시겠지요. 늦었지만 정신 차리겠습니다. 섭섭하시더라도 부디 건강하셔서 지금까지처럼 행사 때마다 늘 나오십시오. ^―^*. 그런데 선배님, 교육과정․교과서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은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데도 우리는 왜 이처럼 서글프게 지내는 것일까요?”

 

 


1)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1999),『인물로 본 편수사(編修史)』(대한교과서주식회사), 16~17.

2) 당시의 편수국에는 편수관실 외에 발행과와 편찬과가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