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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학교교육과정 편성·운영·평가의 실제

by 답설재 2009. 9. 18.

걸핏하면 "그것에 관한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그런 식으로 말하며 살아왔습니다. 대표적인 주제가 ‘학교교육과정’입니다. 쓰긴 뭘 쓰겠습니까. 언제 무슨 수로 쓰겠습니까. 다 썼다면 벌써 책이라도 몇 권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게으르다는 점입니다. 이건 천성이어서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조그만 아이디어도 잘 정리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점은 두고두고 안타깝지만,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죗값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이유 모두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럽습니다.

 

그래서 지난여름 이곳저곳에서 강의한 내용이라도 탑재하게 되었습니다. ‘학교교육과정’에 대해 고심하시는 분들에 대한 회신은 되지 못하더라도 솔직한 제 의견을 보여드리는 데 의의를 둔다면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고, 양해를 구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학교교육과정 편성·운영·평가의 실제

 

 

The curriculum is mirror that reflects America's dreams for its next generation. It is through the school curriculum that Americans attempt to translate their values into reality. Therefore, no area of this nation's schooling has such a difficult, complicated, and dramatic history as the school curriculum.

                                                                                                         -ArthurK.Ellis,JamesA.Mackey,AllenD.Glenn(1988),

 

 

혁신은 언제나 필요하다. 교육에는 수준향상의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에서 혁신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육본질의 혁신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다. 주로 교육환경, 지원행정 등 주변적 혁신에만 주력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지식주입식교육’을 탈피하지 못하여 ‘붕어빵 교육’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한다. 사교육비가 끝없이 늘어나고 조기유학이 늘어나는데도 본질적인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육의 혁신과제는 교과서 내용전달에 치중하는 지식주입교육을 탈피하는 일이다. 식상해할지도 모르지만, 이 과제의 해결로 우리 교육의 수준을 한없이 끌어올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고질적인 폐단을 방치하고 있다. “성공적인 학습이 어떤 것이냐?”를 물을 때 “교과서의 내용을 오랫동안 잘 암기하는 것”이라고 대답해야 한다면 ‘교육’을 한다는 것이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과제의 해결은 현장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그동안의 정부주도 혁신․개혁의 과정이 잘 설명하고 있다.

 

 

Ⅰ. 학교교육과정은 왜 중요한가

 

 

“교육과정은 교육의 목표와 내용, 방법, 평가의 기준이 되고 지원관리기능인 교육행정, 재정, 교원의 양성․수급․연수, 교과서 등 교재개발, 입시제도, 교육시설․설비 등에 대한 정책수립과 집행의 근거가 되는「교육의 기본설계도」로서의 기능을 지니며, 각 학교의 실행 교육과정의 기준이 된다.”

 

이는 초․중등 교원의 기본 연수자료인「교육과정 해설」에 명시된 논리이다. 각 학교에서는 이 논리에 따라 그 학교의 교육과정을 작성하고 실천한다. 그러므로 교육과정이 지원관리기능의 근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교는 행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교육에서 교육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학교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주장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육은 교육과정의 논리에 너무 소홀하며, 바로 그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학교에서의 ‘교육혁신’은 학교교육과정의 편성․운영․평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명분으로는 학교교육기능의 핵심이 교육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교육과정 계획-실천-평가와 피드백의 과정이 허술하기 때문이며, 교육과정은 팽개쳐놓고 여전히 교과서가 교육의 핵심이 되어 그 내용을 전수․암기하는 교육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우리 교육은 ‘붕어빵 교육’ ‘획일적 주입식 교육’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기관이나 기업체가 이처럼 과정과 절차가 미흡한 채로 잘 유지되고 있는가.

 

그러므로 학교가 망하지 않게 하려면 지원행정과 교과서가 지배적인 폐단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또 교육과정 계획은 실천과 잘 연계되어야 하며, 실천 결과는 계획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도 당연한 기본이기 때문에 그것부터 바로잡지 않는 혁신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현장교원들이 그동안의 교육개혁․혁신에 공감하지 않았던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혁신은 작은 것부터’라는 지표(指標)는 이미 이러한 기초․기본이 지켜지는 기업체나 행정기관에 적용되어야 하며, 학교에서는 ‘혁신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의 기초․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지표가 되어야 한다. 기초․기본이 지켜지고 그 수준을 향상시키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혁신사례가 쏟아져 나오게 되므로 혁신은 피로를 주는 것일 수 없고 업무가 늘어날 이유도 없다.

 

 

Ⅱ. 우리는 지금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학교교육과정은 국가 기준과 교육청의 지침을 근거로 지역의 특수성과 학교실정에 알맞게 각 학교별로 마련한 ‘실행교육과정’이다. 따라서 학교교육과정은 ‘교육경험의 질’을 관리하는 구체적 교육 프로그램으로서의 실천적, 포괄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교육목표, 내용, 방법, 평가, 운영 방식 등을 핵심으로 하고 이들 요인에 영향을 주는 조직, 시설, 예산 등 교육구조적인 요인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까닭은 학교교육과정이 실행교육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교육과정의 개념이 도입된 제6차 교육과정(1992)이래 우리는 그 개념을 확장․발전시켜 왔다고 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학교교육과정을 근거로 수업을 하거나 구체적인 교육활동을 계획하는 학교가 별로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교사들은 심지어 학교교육과정을 참조하지도 않고 학년․학급․교과별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교육과정 문서를 만드는 일은 거의 필요 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단순작업이 되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아직도 종전의 ‘학교경영계획’ 형태의 교육계획을 수립하거나 ‘학교경영계획’과 ‘학교교육과정계획’을 별도로 작성하고 있다. 교육과정 중심 교육계획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교과․특별활동․재량활동 계획은 지나치게 단순하여 실천을 위한 계획이라고 하기가 어렵고, ‘교육과정 지원활동’으로서의 잡다한 시책이나 특별실 활용 같은 계획은 오히려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작성되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교과서대로 가르치는 데 익숙한 교원들이 교육행정기관의 시책에 따라 문서의 형식을 갖추는 데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며, 교과와 재량․특별활동의 정상적 운영보다는 지엽적인 활동을 특색으로 내세우는 학교(그러므로 비정상적인 학교)를 보고 “창의적이다” “잘 한다”고 평가해주어 그런 교육계획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현장은 아직도 저 옛날의 관리중심 교육계획 수립에 익숙해져 있고, 아직도 학교교육과정을 제대로 편성해야 할 뚜렷한 이유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고방식이나 시스템은 종전대로 두고 ‘학생 중심’이니 ‘교육과정 중심’이니 하고 말만 바꾸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교육과정 운영이 도저히 개선될 수 없는 질곡에 빠져 있다. 교육행정가들이나 교사들이나 '교육과정'을 단순히 '교육내용(현실적으로는 교과서)'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어서 겉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교육과정이나 학교교육과정이 없어도’, 또는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는 관점으로 여전히 교과서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 ‘강의’하고 있다.

 

 

Ⅲ. 지식주입식수업은 왜 지양되어야 하는가

 

 

‘학교자율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은 우리 교육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아니다. 기대할 만한 것은, 우리가 교육의 본질추구에 소홀한 면이 있었다면(“공문처리를 하고 남는 시간에 가르친다.”는 자조적 표현도 등장했을 만큼) 이 조치들을 계기로 교육본연의 책무성에 더 충실한 것이 그 조치의 취지에 부응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교육을 어떻게 전개해왔는지, 구체적으로는 학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곳이므로 우리는 학교교육과정을 어떻게 운영해왔는지부터 반성해보아야 한다.

 

로저 샨크(2001)는 ‘지난 세기와 그 이전의 수많은 세기 동안, 교육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지성을 갖춘다는 것은 사실의 축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용하는 능력, 어떤 관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했으며, 교육은 정보의 축적을 의미했고 대중이 생각하는 지성이란 자신이 축적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았지만 그 사실들이 (컴퓨터에 의해) 벽에 씌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를 물었다.1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수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 교육학 강의를 들을 때와 달리 교과서의 내용들을 잘 전달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러한 의식과 행태에 대해서는 수많은 교육학자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고, 우리도 그러한 지적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교실에 들어가면 여전히 전통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교과서의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교육학이 왜 필요하고, 학교교육과정이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학교교육과정은 교육과학기술부나 교육청에서 만들어두라고 하니까 만들어두는 형식적인 문서가 아니다. 학교는 그 학교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과서가 없어도 교육을 하고 수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 의식이나 공동체의 규범 익히기 같은 태도교육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의식의 주입을 강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우선 과제가 되는 교육을 가정한다면, 그러한 환경에서는 개별성이나 자율성, 창조성, 비판적 사고력,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의아한 일일 수밖에 없다.2 우리 교육에서는 그동안 현실적으로는 교과서에 담겨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내용을 전달하고 암기하는 데 힘쓰면서 이론적으로는 자율성이나 탐구하는 능력, 비판적 사고와 같은 고급스런 능력을 강조하는 이원적인 가치 부여 속에서 갈등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교과서의 내용을 잘 익히면 시험을 잘 보고 좋은 성적을 얻는 현실에서 “탐구하라” “비판하라”는 요구가 아무런 소용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탐구시키고 사고시켜야 한다는 것을 입으로만 강조해온 것이다.

 

교육의 가치가 지식이나 가치관의 일방적 전달에 있지 않다면 이러한 모순을 방치하지 말고 빨리 바꾸어야 한다. 앞으로 50년 안에 교실과 교사, 교과서가 있었다는 사실, 교육의 개념을 ‘암기에서 질문과 행동으로’ 바꾸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왜 수능성적을 중시하고, 기억력을 지능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학자(로저 샨크)의 말에, 우리도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3 익숙해진 설명을 한다면, 지식의 양이 확대․확산되는 양상과 속도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소극적․피동적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상황에 맞추어 가르치고 배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벌써부터 ‘공부하는 방법의 공부’ ‘지식을 얻는 지식’을 지식의 제2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4 아직은 학교가 질문하는 능력을 배우기보다는 대답하는 능력을 배우는 곳이기는 하지만, 지향하는 바로는 ‘좋은 물음 만들기(의문 가지기)’야말로 훌륭한 학습이 되고 있다. 그 ‘물음’이라는 것은 자율적․자기주도적으로 지식․정보를 구하는 기준이 되고 학습의욕․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기초적․기본적인 지식만은 주입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의심해야 한다. 그러한 의심을 하지 않고 기초가 되는 지식은 암기시켜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예를 들면 아이들 스스로 얼마든지 창의적인 기호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지도 제작자들이 만든 지도 기호부터 외우도록 용의주도하게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정답을 제시하는 교육을 지양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학습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르쳐야 자율성, 탐구하는 능력, 비판적 사고력 같은 필수적 능력을 기를 수 있으며 그렇게 이루어지는 교육이라야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데 적극적인 교육이 된다. 또 그런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교육이 그동안 구호로만 강조하던 ‘인간교육’ ‘전인교육’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실은 그것이 ‘민주시민교육’이며, 교육의 본래 목적이라는 것을 재인식해야 한다.

 

 

Ⅳ. 어떤 ‘학교행사’여야 하는가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만약 교과서가 없어진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듯한 교과서 내용전달 중심의 지식주입식 교실, “학교행사가 많아서 공부에 지장이 많다”고 비난하면서도 그 폐단을 고치려는 시도(試圖)를 하지 않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학교행사’는 각 학교별로 전통적으로 실시해오는 것과 교육청의 요청․지시에 의해 실시되는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고, ‘교육과정 기준’ 혹은 ‘학교교육과정’에 직접 연계되는 것과 간접적으로 연계되는 것으로 나누어볼 수도 있다. 흔히 교과서의 내용을 전달하는 교육에 대해서는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학교행사’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면 큰 지장이 없으나 너무 많으면 교육과정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 혹은 귀찮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 각 행사별로 지난해의 계획을 보고 특별한 오류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행사교육이라면 ‘학교자율화’는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학교행사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그 수준을 높이려면 각 학교가 절대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 ‘학교교육과정’에 학교행사활동을 합리적으로 편성해 넣어야 한다.

 

1. 전교어린이회 임원선거

 

‘전교어린이회 임원선거’라면 학사일정에는 분명하게 나타내면서 교육과정진도표에는 그 활동에 대한 계획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비합리적이다. 또 어린이회 활동은 자치활동이므로 어린이회 임원선거에 투입되는 시간(가령 3시간)을 모두 특별활동 시간으로 편성하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이렇게 할 수도 있다. 즉 1교시에는 대체로 입후보자들의 마지막 연설을 듣게 되므로 각 교실에서는 그 연설을 듣는 요령을 지도한 뒤 개인별로 ‘입후보자 연설 평가표’를 만들어 그 연설들을 들으며 점수를 기록하게 하고, 그 기록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후보에게 투표하게 하는 ‘국어과 듣기 시간’을 편성할 수 있다. 대체로 교사가 읽어주는 글을 듣고 그 내용을 암기하는 활동에 치중하는 듣기에 비해 실제적인 듣기 공부가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다. 또 투․개표에 두 시간 동안 참여하는 학년이라면 그 시간에 이루어지는 활동의 성격을 분석하여 그 두 시간을 ‘사회’나 ‘특별활동’에 편성해 넣을 수 있다. 아이들은 그러한 활동에서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생생하고 실제적인 ‘사회’ ‘특별활동’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2. 각종 발표대회

 

우리는 ‘영어말하기대회’나 ‘학예발표회’, ‘음악발표회’ 같은 행사 때 청중석의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활동을 시키지 않고 그냥 조용히 앉아서 박수나 치라는 ‘따분한’ 활동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한 장면이 바로 엘리트 중심, 선발 중심, 교사 중심 혹은 공급자 중심 교육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한 양식의 메모지에 감명 깊은 발표, 내가 보기에 제일 훌륭한 발표, 내가 제일 잘 들은 발표를 적어내게 하고 경품을 주는 기회를 가진다면 아이들은 보다 흥미롭게 듣고 보고 감상하며 그 시간에도 값있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엘리트’를 선망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5

3. 교육청의 요청․지시에 따른 행사

 

학교는 일반적으로 학교행사에 대해서 교육청의 요청․지시에 매우 단편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가령 항공과학, 로봇과학, 전자과학, 기계과학, 로켓과학 등 교육청에서 과학교육시책에 적합한 종목을 구상해서 ‘과학의 달’ 행사 종목을 제시(예시)하면 각 학교에서는 그러한 종목의 적합성(학년별 적합성)을 따지지 않고 당연한 듯 획일적으로 그 종목의 행사를 실시한다. 그런 ‘과학의 달’ 행사를 실시하면 일부 학생만 참여할 수 있게 되거나, 흔히 가정학습과제로 돌려 때로는 학부모의 과제가 되고, 고학년만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비정상적인 행사에 그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과학도서 읽기, 식물의 생김새 그리기, 개미의 모습 자세히 그리기, 과학적인 생각의 글쓰기, 만화그리기 같은, 저학년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쉽고 흥미롭게 할 수 있고, 각자 수준에 맞는 종목을 선택할 수 있고, 특별한 준비 없이도 참여할 수 있는 종목들을 추가해서 전교생이 참여할 수 있는 그야말로 ‘과학축제’(체육과에서 나온 ‘운동회’처럼)를 전개할 수 있는데도 무미건조한 그 행사를 의심 없이 반복하고 있다.

 

4.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행사

 

교육청의 요청․지시에 대해서는 다른 예를 들 수도 있다. 가령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작품을 공모하는 행사를 실시하고 우수작을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으면 어느 학년을 ‘동원’하거나 차례로 한 반씩 배정하여 ‘비교육적인 노동’을 시키기도 한다. 그런 학교에서는 학교교육과정이 그런 행사를 포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의 주제를 모으고 통합하여 어느 학년이나 모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여러 가지 주제를 제시하여 각자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글짓기뿐만 아니라 만화그리기, 포스터그리기, 표어만들기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작품을 제출할 수 있게 한다면 아이들이 즐겁고 유익하게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문예행사가 될 수 있고, 교육청의 요구가 빈번하다는 불평을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시책에 의한 행사들이 교사들의 불평과 비난을 불러일으킨다면, 더구나 학생들이 ‘동원’된다면, 그러한 교육활동은 절대로 교육적이거나 효과적일 수 없다. 잘 된 작품을 뽑아 교육청이나 소방서에 제출하기 위한 불조심 포스터그리기는 아이들이 집에 가져가 부엌에 붙이기 위한 실제적인 불조심 포스터그리기로 바꾸어야 한다.

 

5. 행사활동의 평가

 

행사활동의 편성과 운영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평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른바 ‘학교행사’에 대한 문제점은 그러한 교육활동을 평가하는 우리의 관점이 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흔히 학교교육과정 평가는 학기말이나 학년도말에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평가가 그렇듯이 평가는 학습활동의 과정(過程)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교육적이며, 활동이 일어난 즉시 이루어지는 것이 효과적이다. 따라서 ‘전교어린이회 임원선거’가 이루어졌다면 당선자 명단만을 결재하고, 임명장을 주면 그만이라고 보는 관점을 바꾸어 그 교육활동의 실태와 문제점,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보고서 제출로써 차기 선거가 보다 수준 높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하면 필자가 이 글에서 예시한 사례들도 더욱 수준 높은 사례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6. 학교행사의 계획과 운영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이 ‘학교교육과정’이라는 문서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학교행사’로 불리는 범교과 교육이 모두 학교교육과정 속에 편성된다면, ‘교육과정진도표’는 교과서 단원을 소요시간 수에 따라 늘어놓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고 학교교육과정을 운영하기 위한 실제적인 일정표가 될 것이다. 또 교재는 재구성되어야 하고, 학교교육과정 중심의 동학년회의가 이루어져야 하고, 연간교육활동을 구상하고 운영하기 위한 학교교육과정위원회가 구성․운영되어야 하고, 학교교육과정은 일련의 과정에 따라 적합한 절차를 거쳐 편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절로 확실해진다.

 

 

Ⅴ. 학교교육과정에 대해 어떤 연구가 필요한가

 

 

타일러(RalphW.Tyler, 1949)는 교육과정이나 수업계획을 편성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다.6

 

타일러의 교육과정 모형

 

① 학교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교육목표는 무엇인가?

②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학습경험 선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③ 이러한 학습경험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④ 교육목표의 달성 여부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이로써 우리는 학교교육과정 운영에 관한 현장연구의 방향과 과제를 짐작할 수 있다. 즉, 타일러의 모형을 보면 교육목표와 내용, 방법, 평가 간에는 상호 순환관계가 유지되므로 여기에 교육과정 운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요인까지 보면 교육과정 운영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현장연구의 방향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연구과제 설정의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 각 학교의 교육과정은 교육과정 모형의 순환관계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가? 즉, 편성-운영-평가 간에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는가? 학교교육과정의 구성 요인 간에는 밀접한 상호 관련성이 유지되고 있는가?

○ 교육평가는 그 학교에서 계획하고 의도한 교육과정의 효과를 검정해주고 있으며, 그러한 계획의 수정이나 개선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 지원관리기능은 학교교육과정의 목표와 내용, 방법, 평가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수준을 높이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하는가?

 

 

Ⅵ.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가(요약)

 

 

우리 교육에서 ‘혁신’은 학교교육과정의 편성․운영․평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겉으로는 학교교육기능의 핵심이 교육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교육과정 편성-운영-평가(피드백)의 과정이 너무 허술하거나 교육과정 이외의 일에 매몰되는 경우까지 있기 때문이다.

 

학교교육과정은 팽개쳐놓고 여전히 교과서 내용전달․암기교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학교교육과정 운영과 관련도 없는 일을 중시하는 학교경영에 치중하는 학교교육으로는 우선 우리 교육자들이 행복해질 수가 없다. 학교교육과정에 소홀한 학교경영으로는 교장도 교사들도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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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저샨크Roger C. Schank, 2001.「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존 브록만 엮음․ 이한음 옮김,『앞으로 50년』(생각의나무, 2002), 295~297.
2. 강우철의 사회과 교육의 현실에 대한 설명이 바로 이와 같다. 개별성이니 자율성이니 창조성이니 하는 교육의 이상은 공동체적 규범을 익히는 것을 중요시하던 문화 환경에서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강우철, 1991.도전받는 사회과, 강우철 편, 달라져야 할 사회과 교육, 교학사, 10~
11).
3. '우리가 아직 교사와 교실과 교과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50년 뒤에는 거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교육개념을 바꾸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왜 수능성적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왜 답을 암기하는 것이 지능의 증거라고 생각했는지 물을 것이다(로저 샨크의 위의 책, 301).
4. '교육적 지식은 정태적인 관조적 지식만이 아니라 역동적인 실행적 지식과 균형을 이루어 통합되어야 한다. (중략) 지식교육에 관한 한, 학교는 엘리트나 천재에 의해서 개발된 고도의 권위적 지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지식사회의 환경 속에서 대중에 의해서 생산된 지식을 대상으로 교육할 것이므로, 전달된 지식과 정보의 단순한 수용보다는 지식과 정보를 평가하고, 선택하고, 조직하고, 활용하고, 생산하고, 재구성하는 데 관련된 능력을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이다'(교육부 미간행 자료집, 2000. 11,「지식기반사회와 교육」,39).
5. '만일 의미가 문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학교의 사명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다양한 형태의 이해를 촉진하는 것이라면, 학생들이 ‘다중문해력’을 가지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과정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중략)… 만일 정신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우리의 앎의 방식이 협소하지 않고 넓을 경우에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 훨씬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 Elliot W. Eisner 지음․ 박승배 옮김,『인지와 교육과정』(교육과학사, 2005, 초판2쇄), 지은이의 한국어판 머리말에서 -
6. 이종승, 1990,『TYLER 敎育課程과 授業의 原理』, 교육과학사,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