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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존 테일러 개토 『바보 만들기』

by 답설재 2009. 11. 18.

존 테일러 개토 씀․ 김기협 옮김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Dumbing Us Down 바보 만들기』

민들레, 2005

 

 

 

 

 

 

책을 들자마자 밑줄부터 긋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말', '펴낸이의 말', '한국어판 펴낸이의 말'에서 이미 몇 군데나 그었고, '들어가는 말'에서는 더 많이 그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옳게 읽고 있는가?' 싶어서 그때까지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확인하기까지 했습니다. 말하자면 어쭙잖은 책에 이렇게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스스로 좀 부끄러울 일 아닌가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부터 옮겨보겠습니다.

토마스 무어가 2001년에 쓴 머리말에서 벌써 세 군데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아버지 역시 존 개토가 통쾌하게 비판하는 완고한 관료주의의 앞에서 좌절감을 겪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동네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강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이 마시는 수돗물이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정수되는지, 쓴 뒤에는 어디로 가는지를 배관 전문가로서 가르쳐주고 싶다고 한 것이다. 학교 당국은 고마운 제안이지만 시간표에 여유가 없다고 사양했다.(7)

 

한 의사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기가 환자를 쳐다보고 있지 않을 때라고. 내가 보기에 학습은 교사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뤄지는 것이다. 진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아는 보통 학교에서가 아니라 존 개토가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파출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러 갈 때, 아이들이 신문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출판사에 가서 견습 활동을 할 때와 같은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제도적 편의를 위해 토막내 놓은 시간 조각 안에서, 학생들이 살고 있는 실제 세상에서 격리된 교실 안에서, 진정한 학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인생이 서로 관련 없는 과목과 장, 절 따위로 쪼개져 있을 때 학습은 이뤄지지 않는다.(8)

 

존의 말이 맞다. 학교를 개선하겠다고 조물락거려 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바닥에서 다시 출발해 교육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마음의 교육만이 아니라 영혼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 교육을 통해 이 세상에 창조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고, 좋은 우정을 가꾸고,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에서 살고,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하고, 사회에 훌륭한 공헌을 하는 사람을 키워내기를 나는 바란다.(9)

 

나는 1년 내내 담임이 가르쳐야 마음이 놓이고, 담임이 가르쳐야 직성이 풀리는 이 교육이 답답합니다. 다른 교장은 나를 보고 잘난 체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학년별로 대여섯 번의 현장학습을 내보내는 이유도, 어느 기관에서 아이들에게 경제에 관해, 폭력에 관해, 보건에 관해 강의를 해주겠다는 공문이 오면 얼른 신청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설명하는 기술은 한심하더라도 몇 명의 학부모가 1년에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자원인사가 되어준다면, 아이들은 유창하게 설명하는 교사에게서보다 더 많이 느끼고 배울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교사와 함께 동네 문방구나 음식점에라도 함께 나가보는 활동이, 교과서만 쳐다보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체육 교과서를 보느니 -그렇다고 교과서 무용론을 주장하는 거냐고 한다면, 나는 또다른 논의를 얼마든지 전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예 운동장에 나가 그냥 실컷 놀아버리는 것이 '백 배'는 더 나을 것입니다.

 

한 차시의 3/4, 아니 9/10를 교사가 가르쳐야(설명해야, 아이들의 입에 떠넣어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리하여 아이들은 겨우 1/10 정도의 시간에 생각을 해보거나 읽어보거나 써보거나 하다못해 공상에 잠겨보는 여유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가련하고 무지막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교사는 어디 마음대로 합니까? 어려운 문제거나 쉬운 문제거나, 복잡한 과제거나 단순한 과제거나, 방대한 양의 문제거나 단순 명료한 문제거나 일단 40분만에 판을 거둬치울 수 있는 요령부터 익혀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제도입니다. 한때 블록타임이니 뭐니 하더니 그것조차 유행처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제가 시작한 1969년에 비해 더 발전한 것은 그 낭만적인 종소리가 자동으로 울리는 멜로디로 변한 것 뿐입니다. 그림연극틀이나 환등기 대신 교묘한 지식주입식 교육에 만능으로 쓰이는 교사용 컴퓨터와 프로젝션 TV가 보급되어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게 아닙니까? 내가 잘못 지적하고 있습니까? 달라진 것이 많습니까? 그때보다 더 영혼의 교육에 힘쓰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그때보다 더 창조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좋은 우정을 가꾸어가고 있습니까? 부모와의 관계, 교사와의 관계가 더 따뜻해져서 살 만한 세상이라는 걸 강조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습니까? 자신들이 사는 동네와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보람있는 일을 하며 지냅니까? 이웃의 슬픔을 보면 눈물겨워하고, 동네의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해줍니까?

아니라면, 장차 사회에 나가 크게 공헌할 아이들은 그런 일에는 본래 무관심한 법입니까? ……. 도대체 교육은 왜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학교를 개선하겠다고 조물락거려 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내가 그런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교육행정가들은 "아, 이 책은 『학교는 죽었다』류의 나쁜 책이라고 제법 아는 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이 열심히 '조물락거려 봐야' 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펴낸이의 말'(뉴소사이어티출판사 대표 데이비드 H. 앨버트)에서 옮기겠습니다. 또 세 군데입니다.

 

사회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체주의 교육의 목적은 신념을 키워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이라도 만들어낼 능력을 박멸하는 데 있다."(한나 아렌트, Totalitarianism, 뉴욕, 1968, P. 168) (11)

 

자원이 빠르게 고갈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것을 확보해주려고 경쟁적으로 날뛰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교사 봉급을 올리기 위해, 장비를 더 구입하기 위해, 학교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미친 듯한 경쟁,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한 아귀다툼을 보며 자라는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잘못 없이 경쟁에 져서 탈락하는 아이들에게 이 미치광이 경쟁은 어떤 생각을 심어줄까?(12)

 

그가 26년 동안의 교육홛동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교육의 질적인 선택권을 가난하고 불리한 조건에 놓인 학생들, 또 그 선택권을 가장 필요로 하는 학생들에게 베풀어주려는 의지다. 둘쨰로 최소한 자기 학생들은 '학교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해주려는 양심선언이다.(13)

 

다음은, '한국어판 펴낸이의 말'에서 옮깁니다.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정신차리게 해서 학교에 묶어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아이들은 모름지기 어른 말 잘 듣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낫다고 우기는 이들, 그러면서 또한 우등상이 곧 우수함을 증명한다고 믿는 이들, 일류대 졸업장이 인생의 보증수표라도 되는 듯이 여기는 이들 모두 아직도 잠이 덜 깬 것이다.(14)

 

학교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아이들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가능성을 매장당한 채 그저 밥벌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어른이 되는 현실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국가들이라면 똑같이 겪는 비극이다.(16)

 

드디어 저자의 '들어가는 말'입니다.

 

지난 26년간 저는 교실을 인간의 가능성이 어떠한 범위에 걸쳐 있는지, 그 희망과 두려움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탐구하는 실험실로 써 왔으며, 인간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도록 해주는 것은 어떠한 것이며 묶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그곳에서 연구해왔습니다.

그 기간을 통해 저는 천재성이라는 것이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로서, 우리들 대부분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제게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두 곳의 일류 대학에서 받은 훈련을 통해 지능과 재능은 종 모양 곡선에 따라 경제적으로 분포한다고 배웠습니다.

…(중략)…

문제는 통찰력, 지혜, 정의감, 너그러움, 용기, 창의성 같은 인간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전혀 엉뚱한 아이들에게서 수시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혼란을 느꼈습니다.

…(중략)…

학교에 다니는 일 자체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 말입니다. 제가 월급 타 먹으며 한다는 짓이 학생들의 능력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줄여주는 것은 아닌가? 처음에는 황당무계한 의문 같았지만 저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소리, 교실에 가두기, 맹목적인 줄 세우기, 동년배 모아놓기, 혼자 있지 못하게 하기, 끊임없는 감시 같은 학교제도의 모든 일반적인 요소들이 마치 누군가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꾸며낸 것 같다는 것을, 학생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중독 상태나 종속적인 태도에 빠지도록 말입니다.(21~22)

 

천재성은, 종 모양 곡선에 따라 경제적으로 분포하는 '재능과 지능'에서 저 위의 겨우 몇 명만이 가진 특성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성질이라는 존 테일러 개토의 가설에 따르면, 우리의 행정이 겨우 1%, 혹은 5%의 아이들에게 '영재'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교육을 시키고 있는 '특별 대우'는 어림없는 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 테일러 개토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이미 전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영재교육을 실시하는 나라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존 테일러 개토는, 우리의 교육방향이 옳은 것이라면,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통찰력, 지혜, 정의감, 너그러움, 용기, 창의성 같은 인간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특징들을 더 많이 가져야 할 것 아니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존 테일러 개토가 아니라도 그러한 논리에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소리, 교실에 가두기, 맹목적인 줄 세우기, 동년배 모아놓기, 혼자 있지 못하게 하기, 끊임없는 감시 같은 학교제도로는 그러한 특징들이 잘 길러질 것 같지 않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옮긴 글과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본문에서는 두어 군데만 옮겨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데 더 많은 기술이 생겨났지만, 지식을 직접 얻을 수 없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교사가 조각조각 던져주는 추상적인 지식만 배우다보니 졸업할 때는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전체적 질서에 젖어 있는 사람이 되어 있던 겁니다. 이런 '소시민'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대들 수가 없지요. 설혹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한결같이 지닐 줄도 모르고 넓게 생각할 줄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학교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은 비판하는 생각을 할 줄 모르고 올바르게 토론할 줄도 모르는 겁니다.(56~57)

 

25년 동안의 교사 생활을 통해 제가 관찰해온 기가 막힌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학교제도와 학교교육이 갈수록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일들과 관계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 공부 잘한 아이들이 과학자가 되고 사회 공부 잘한 아이들이 정치가가 되고 국어 공부 잘한 아이들이 시인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따르는 법 말고는 진짜로 가르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수없이 많은 선량하고 열성적인 사람들이 학교에서 교사로, 직원으로, 보조원으로 일하고들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제도 자체의 추상적인 논리 속에 파묻혀버리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아무리 정성을 쏟고 열심히 일해도 제도 자체가 미치광이입니다. 양심이 없는 제도죠. 한참 시를 짓고 있던 젊은이도 종이 울리면 바로 공책을 덮고 다른 교실로 달려가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외울 준비를 하게 하는 그런 제도니까요.(66)

 

더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았고, 이미 넘긴 페이지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용해두고 싶은 부분을 모조리 다 인용한다는 것은, 이 책을 새로 다 읽는 것과 같고, 혹 이 서평을 읽는 분에게도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점 한 가지를 밝힙니다. 대안으로 제시된 뒷부분(「초록색 마을 모농가헬라」「교육을 삶 속으로 되돌려 놓자」「학교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문제점을 지적한 앞부분(「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학교의 악몽」「미치광이 학교」)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당장 우리가 어떻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존 테일러 개토처럼 학교와 교실을 뛰쳐나가기는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는 교실을 떠났지만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살아가는 일에서는, 우리처럼 소심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다음 인용을 보십시오.

 

펜실베니아 주 모농가헬라 마을에서 자라나 열세 살배기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세월을 보내던 한 사내가 백악관에서, 상원 사무실 건물에서, 카토 연구소에서, 내슈빌 예술센터에서, 나사 우주센터의 '기술토론회'에서, 애플 컴퓨터에서, 이글 포럼에서,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 코퍼레이션에서, 농업조합에서, 그리고 싱가포르, 콸라룸푸르, 보고타 등지의 정부 관리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십 년 동안 150만 마일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들어가는 말'(「걸어온 길」)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보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조그만 머리통에 제가 가진 전문 지식을 채워 넣어주는 전문가의 입장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대신 아이들이 내재적 재능의 구현을 가로막는 요인들을 제거해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교실 안에서 불쌍한 학생들에게 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 제 일이라는 생각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 쓸데없는 수작을 아직까지도 계속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제도교육의 성격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죠.

 

그러나 꼭 비관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교사라는 사실이 너무나 비참할 것입니다.

덧붙이면, 이렇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어둠 속에서 어두운 줄도 모르는 교사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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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마스 무어는 음악가이자 작가로서『영혼의 보살핌 care of the Soul: A Guide for Cultivating Depth and Sacredness in Everyday life』『영혼의 짝 Soul Mates: Honoring the Misteries of Love and Relationship』『일상의 새로운 매혹 The Re-Enchantment of Everyday life』『섹스의 영혼 The Soul of Sex』같은 책을 썼습니다(작가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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