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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오히예사 『인디언의 영혼』

by 답설재 2009. 10. 21.

오히예사 『인디언의 영혼』

류시화 옮김, 오래된미래 2004

 

 

 

 

 

 

아이들과 함께 지내니까 별걸 다 보게 됩니다. 며칠 전에는 2학년 아이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음악에 맞추어 인디언 춤을 보여주었습니다. 비가 온 뒤라 쌀쌀한 것 같았는데 그들은 가을이 깊어지면 본래 그렇다는 걸 아는 듯했습니다.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듯했습니다.

 

 

내가 물었다.

 

"왜 어떤 뿌리는 약초로 쓰고, 어떤 건 쓰지 않는 거죠?"

할머니가 특유의 빠른 말투로 대답하셨다.

"왜냐하면 '위대한 신비'(인디언들이 절대적 존재인 신을 가리킬 때 쓰는 말. '위대한 정령'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께서는 우리가 무엇이든 쉽게 찾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지. 그렇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치료사가 되겠다고 나설 테니까. 불쌍한 막내야, 넌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많은 비밀이 있지만, '위대한 신비'께서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그 비밀을 열어 보이신다. 금식 수행을 하면서 홀로 ‘위대한 신비’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분이 보내는 신호를 받을 수 있지."(26~27)

 

 

그렇겠지요? 자연의 신비, 삶의 신비가 아무에게나 다 보인다면 그게 대단하겠습니까? 그럼 '자격'이란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요? 그게 뭔지 나도 모르지만, 저 아이들은 그 비밀을 알아낼 것입니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아이들의 모습이 진지하고 아름다워서 저 아이들은 틀림없이그 비밀을 알아내겠구나싶었습니다. 비밀, 그걸 알아낸 사람은, 그게 아주 멀고 깊은 곳에 있지도 않다는 걸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해도 우리는 끝내 그걸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교육의 잘 할 수 있는 비밀 같은 건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 있어서 우리가 그걸 찾고 싶은데도 이러고 있는 걸까요?

 

 

 

 

 

 

이 책을 쓴 인디언 오히예사가 어떤 인물인가 싶었는데 본문에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선교사 알프레드 지그스 박사가 세운 산티 수우 기숙사 학교를 졸업한 오히예사는 위스콘신 주의 벨로이트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오히예사가 벨로이트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 세상을 떠났다. 야생의 숲을 떠돌던 아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내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오히혜사는 보스톤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인디언의 정신을 본받는 보이스카웃 창단에 힘썼다.(133~134)

 

오히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연의 신비를 캐고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현대 사상가들에게도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생명의 원리와 탄생이라는 궁극의 기적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 궁극의 신비가 바로 예배의 본질이며, 그것 없이 종교는 있을 수 없다. 이 궁극의 신비 앞에서 인간은 무릇 인디언과 같은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인디언들은 모든 창조물 속에서 경이로운 눈을 갖고 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래의 철학을 간직하고 있던 시절에는, 얼굴 흰 사람들의 눈부신 성공을 질투하거나 모방하려는 욕망을 지닌 인디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인디언들이 얼굴 흰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했다. 우리는 내심 그들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인디언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부유한 이웃의 빈둥거리는 생활과 화려한 음식, 푹신한 침대들을 물리칠 수 있는 고결한 영혼들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보기에 참된 인격과 행복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실 초기 기독교 속에는 인디언들의 사상과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부와 부자들에 대해 예수가 한 말은 우리 인디언들이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설교를 늘어놓으면서도 한편으론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선교사들과 그 신도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종교에 대해 냉담한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기를 과시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무조건 남을 개종하려 든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종교를 제외하고는 다른 종교를 드러내 놓고 무시한다.

 

우리의 눈에는 직업적인 목사들, 돈을 받고 하는 설교, 물질을 모으기에 급급한 교회들은 영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체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감화도 받을 수가 없었다. 정복과 약탈, 독한 술 등으로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무너뜨리기 훨씬 전부터 선교사들은 이미 우리에게서 도덕적인 진실성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부심 강한 우리 야만인들은 우리를 개종시키고 개화시키려고 찾아온 그들을 은밀히 경멸하기까지 했다.

 

인디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얼굴 흰 사람들의 종교가 자기 선전에 열을 올리면서 위선적으로 행동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디언들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믿기 어려웠던 점은 얼굴 흰 사람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우월한 인종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은 그들 중 많은 숫자가 너무나 종교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신앙인인 체 행동하지도 않았다. 믿음을 갖기는커녕 세속적이고 불경스런 말들로 쉬지 않고 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우리 인디언들은 가장 경건한 순간에조차 신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경박하고 속되게 신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종교를 앞세우는 사람들에게서도 모순된 행위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영적인 것을 말하면서 한편으론 물질적인 추구에 몰두해 있다. 얼굴 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고판다. 시간, 노동, 개인의 자유, 여인의 사랑, 심지어 자신들의 신성/한 목사직까지도! 이론적으로는 맨 첫 번째에 속하는 순결하고 영적인 삶이 실제로는 맨 나중의 문제로 밀려나 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추구, 남을 정복하려는 욕망은 배우지 못한 인디언들의 세계에서도 비난을 면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지배하려고 드는 얼굴 흰 사람들의 두드러진 성향이 온유하고 가난한 정신을 설파한 예수의 사상과 너무도 반대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꼈다.(149~151)

 

 

마지막으로 오히예사의 영혼(인디언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가를 보십시오.

 

 

인디언 어머니는 언제나 외곬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우리 부족의 이름난 어떤 추장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자들은 서로를 죽일 수 있지만, 여자를 정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자의 편안한 무릎에 아이가 누워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없애 버릴 수도 있겠지만, 똑같은 무릎에 또 다른 아이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신비'가 주신 선물이며, 남자는 단지 협력자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다."(156)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의 인디언 춤을 감상해보십시오. 저 눈망울 속에, 저 영혼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이라면 누구에게 총을 겨누었겠는지, 누구에게 스스로 총을 겨누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아이들에게 무얼 가르칠 수 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구체적으로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보십시오.

 

 

 

 

<사진 : 김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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