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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지급 : 국정감사와 행정감사 요구자료 제출

by 답설재 2009. 9. 24.

 

 

 

하늘이 높습니다. 길가의 코스모스도 좋고, 아이들 공부하기에도 이보다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날에 9시가 지났는데도 교실이 조용해지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갔는지 아이들이 떠들어댑니다. 애가 타지만 당장 ‘호통’을 치거나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들처럼 ‘지급’이니 ‘긴급’이니 할 수도 없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있고, 그걸 문제 삼아서 선생님들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아이들에게 득 될 것도 없습니다.

 

학교에는 국회의원들이 요구하는 자료 중의 반 이상이 <지급>이나 <긴급>으로 떨어집니다. ‘교육공무원 출신교 및 성과상여금 관련 조사, 학업중단 학생의 학업중단 사유 조사, 자퇴․휴학․장기결석 현황 조사, 건강검진 상황 조사, 보건교사 배치 및 보건실 이용 학생 수와 약품 구입 예산 조사, 학교 축제 외부 기획사 의뢰 현황 및 참여 연예인, 지급액 조사, 칠판 사용 및 교체 현황 조사, 재량활동 선택과목 운영 현황 조사, 초등학생 유학 현황 조사, 최근 3년간 학교에서 사건․사고로 인해 타 학교로 전학 조치한 사례 조사, 학교 당직 경비 요원 연령별 현황 조사 등이 최근에 <지급>이나 <긴급>으로 온 공문입니다.

 

이런 걸 왜 긴급, 지급으로 조사해야 할까요?

뭐가 그리 급할까요?

지금까지 무얼 하고 있다가 갑자기 조사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오늘 중에 보고해 달라고 하면 됐지 꼭 <지급>이니 <긴급>이니 해야 할까요?

아이들 가르치는 것보다 더 긴급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아이들은 늘 가르치는 게 아니냐? 모처럼 한번 긴급하게 조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느냐?”고 하겠습니까? ‘모처럼’ ‘한 번’이라는 그 사고(思考)가 아이들이나 기본 업무가 방치되는 시간의 계기가 됩니다.

이번에는 “누가 수업하지 말고 보고해 달라고 했나?” 그러겠습니까?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긴급>이라는데, 그걸 옆에 두고 태연하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 선생님은 대단한 심장을 가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교육신문에는 「국감자료 홍수…“수업 언제 하나”」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2009. 9. 21, 6면).

“교총이 지난 6월 실시한 온라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교사들 10명 가운데 7명은 공문처리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이상 수업시간을 자율학습 등으로 대체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달에 4회 이상 자율학습으로 대체했다는 응답도 15.9%에 달했다.”

 

이런 국회의원, 도의원들이라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냥 조사해 달라고 했지, 언제 지급으로 조사해달라고 했나?” 그러겠습니까? 조사기한을 짧게 주니까 장학사나 사무관들은 <긴급> <지급> 공문을 내야 한다는 것쯤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더구나 현장교원이 아니고 지시․명령에 철저해야 하는 행정가들입니다. 우리와 또 다릅니다.

“그것까지 내가 챙겨야 하느냐?”고 반문한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냥 ‘한심하다’고 할 수밖에요.

 

변화시키고 혁신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어디를 고쳐야 합니까? 국회와 도의회?(이제부터 조사하지 않기!), 학교?(어떤 공문이 오더라도 모른 체하기! 그런 강심장을 가지기!), 교육청?(실제조사를 하지 않고 엉터리나 짐작으로 보고하기!), 허울 좋은 ‘잡무경감방안’ 마련?(예의 한국교육신문 기사에는 그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나 지방의회 의원들의 조사가 잡무입니까? 그렇게 분류해도 좋습니까?).

 

모두 정답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정답은 다 바꾸는 것입니다.

앨빈 토플러가 2008년 말에 우리나라 국회 강연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 국회의원들이 일하는 국회에서 한 강연이었습니다. “한국은 현 교육제도를 잘라내 버려야 한다(Chop off your education system)."

그는 ‘한국이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묻자 현행 교육제도에 대해 이 같은 독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합니다(매일경제, 2008. 11. 29, A30).

 

국회나 도의회, 도교육위원회,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 교육청, 학교가 다 바뀌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면,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먼저’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군림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큰일이나 한다고 그렇게 으스대고 독촉합니까. 그들이 군림하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 국민 모두의 의식(意識)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바로잡히면 앨빈 토플러가 “Chop off your education system.”이라고 한 까닭을 비로소 제대로 인식하게 되고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의식을 바로잡는 얘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신종 플루 때문에 모두 유보․대체․포기했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우리 학교는 지금쯤 온갖 현장학습을 할 시기입니다. 학년마다 6회씩 연간 36회의 현장학습을 하고, 청소년 단체, 유치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게 되니까 걸핏하면 운동장이 관광버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일어난 일입니다. 계약을 한 관광버스회사 상무라는 사람이 급히 다른 회사 버스를 구해 와서 자랑스럽다는 듯 얘기했습니다. “오늘 국정감사를 나가는 국회의원들 때문에 우리 회사 버스들은 국회로 보냈습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와! 그 회사 대단하군요.” 어울립니까?

“국정감사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까짓 거 우리 애들이야 어느 회사 버스를 타면 뭐 어떻습니까.” 그랬으면 좋을까요?

 

저는 그에게는 아무 말 않고 당장 행정실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앞으로 저 회사 버스는 내가 이 학교에 있는 한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절대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국회의원이 우리 아이들보다 중요하고, 국정감사가 우리 학교 교육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회사에게 우리 아이들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을 실은 버스는 어떤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럴 때 저 회사 운전기사들은 아이들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회사에서 연간 수백 대의 버스를 이용하다가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우리 교장은 눈에 뵈는 게 없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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