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문학』9월호(244~253)에「백남준의 비데아-비데올로기」(백남준 지음, 안소연 편집․번역)가 연재되었습니다(「미술세계」연재 제8회).
이런 역자 주가 붙어 있습니다.
“이 글은 1974년 뉴욕 에버슨미술관에서 발행한 백남준 전시도록『Nam June Paik : Videa ᾕ Videology 1959-1973』1)에서 참조한 글이다.” 글의 끝에도 다음과 같은 역주(譯註)가 붙어 있습니다. “이 글은 1968년 퐁투스 훌텐Pontus Hulten이 기획하여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최한「The Machine」전시의 도록에 실린 글을 1970년에 보완한 것이다. 전시는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태도에 주목했으며 뒤러,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부터 팅겔리, 백남준에 이르는 방대한 미술사를 조망했다.”
뜻을 파악하지 못한 채 -영어 문장 읽듯이- 제7회까지 무턱대고 읽어와서 드디어 제8회의 연재를 읽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드디어 그의 아포리즘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건방진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1968년 언저리에 썼다는 걸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1968년이라면 베트남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던 때였고, 저는 2년제 교육대학 졸업반이었습니다. 이번 호의 글은 이런 아포리즘으로 시작됩니다.
“마르크스에서 슈펭글러, 톨스토이에서 토크빌2)에 이르기까지 근대에 나타났던 어떤 예언자도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주차난이다.”
(백남준은 TV 수십 대를 쌓아놓는 괴짜 공연예술가인줄만 알았습니다. 미국에는 그런 행위예술을 좋아하거나,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공연예술 혹은 전위예술을 인정할 만한 우호적이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백남준은 우리나라가 아닌 그곳에서 살다가 갔을 것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있다한들, 혹은 그걸 덧붙인다한들 더 나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서 '발견'한 그의 글 몇 가지를 옮겨놓겠습니다. 그게 더 좋을 것입니다.)
수백 년 전에 니체가 말했다.……“신은 죽었다.”라고.이제 나는 말한다. “종이는 죽었다…… 화장지만 빼고.”만약 오늘날 조이스가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히 ‘피네간의 경야’를 비디오테이프에 기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磁氣에 정보를 보관하는 것은 정보의 무한한 활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때문에 종이가 오히려 더 많이 소비되고 있다는 말을 저도 곧잘 하고 있습니다. 교장이니까 그 종이를 대어줘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은 얼마나 변했습니까? 컴퓨터가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옛날처럼 아직도 하루에 겨우 몇 장의 종이만 소비하며 그렇게 살고 있을까요? 더구나 컴퓨터는 필연적으로 나왔고, 종이를 많이 소비하는 것이 이 물건이 나온 이유도 아닐 것입니다.)
TV는 섹스와 같은 대중매체다.킨제이 이전에, 아름다운 여인은 “내 남편은 피아노로… 오직 한 곡만을… 언제나 한 손가락으로 연주하지요….”라고 이웃에게 푸념하곤 했다. 킨제이는 이 욕구불만을 해소하고 정설에 이의를 제기했다. 지금 이 순간 TV 문화란 킨제이 전 단계와 같다. 과거에 부인들이 남편의 성적 대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오늘날 대중은 네트워크를 위한 파블로프의 개에 불과하다. TV의 무한한 잠재성, 예를 들어 상호소통이나 시청자 참여, 존 케이지가 말한 “임시 국민투표를 통한 전자 민주주의” 등……은 한참 무시되고 교묘하게 억압되었다.(247)
(그렇다면 저 TV의 진화는 아직 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2000년대 초에『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육적인 TV를 어떻게 비교육화 할 것인가???
(아직도 TV를 교육적이 되도록 하려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인양 비판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저런 프로그램을 뭐하려고……" 하고 TV에서 뭔가를 배워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TV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그보다 현실적인, 당면한 문제는 "도대체 우리를 가르치려드는 것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 우리를 간섭하지 말고 자신들이나 잘 하고 잘 지내면 좋을텐데…….")
언젠가는 아무 효능도 없는 알약 TV 광고가 등장할 것이다.(월간 아틀란틱 잡지)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무언가 덧붙이고 싶어 입이 근질거립니다. "TV 광고의 위력! 그리고 그 무서움…….")
최소한 하나쯤은 침묵하는 TV 방송국이 있어야 한다!!TV 영상보다 TV의 소리가 나를 더 괴롭힌다.(249)
(그리하여 차라리 없어졌으면 더 좋겠다는,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습니다. '침묵하는 TV'라면 대 환영입니다. 우리 동네 그 병원에는 '침묵하는 TV'를 흉내내어 그림만 보여줍니다. 마치 병원에서의 짧은 시간에라도 편하게 지내라는 것처럼.)
모든 위대한 사상은 등사기에서 나왔다.모든 위대한 시인은 보잘것없는 잡지에서 출발했다.그러나 TV의 생산비용이 오늘날처럼 끔찍하게 비싸다면, TV 상형문자나 양피지 이래로 인류가 발명한 가장 억압적인 매체가 될 것이다.(249~250)
(억압적이라기보다 막 뒤집어 엎으려든답니다. 말릴 힘을 가진 사람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노벨문학상(2002년)양장본이든 보급판이든…… 단 한 번도 책을 출간한 적이 없는 소설가가 비디오 기계에 직접 녹화하고 복사해서 만든 비디오 소설에 수여……만일 2002년에도 노벨상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면.(250)
(이미 출판된 어머어마한 양의 책들을 전자화하는 일쯤은 거론할 필요도 없고, 아예 인터넷에 막바로 작품을 쓰는 유명작가가 많지 않습니까? '에이, 2002년은 이미 지났는데…….' 하면 그에게 실례가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묘사하는 데 서른 페이지를 할애했고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를 묘사하는 데 스무 페이지를 할애했다. 간단하게 폴라로이드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되었을 것을.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겠지요. 안나 카레리나에 대한 묘사, 마담 보바리에 대한 묘사는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하더라도…. "백남준씨! 이 사람들이 이제 폴라로이드도 찾지 않는데요? 다음은 뭐지요?")
도래할 화상전화시대에 가장 혜택을 볼 사람은?방위산업?콜걸 시스템?비디오 보모 회사?아마도 반라의 전화서비스가 성행할 것이다.("다 나왔습니다. 당신이 예측한 대로. 그 다음은요?")
전자공학의 발전을 막을 수 없다면 (1929년 현재)노출의 발전도 막을 수 없다. (천국에서 현재)마치 달이 태양을 따르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뒤따른다.(251)
마루 전체를 덮는 카펫……………………………………………………………………………………………1940.모든 벽마다 TV……………………………………………………………………………………………………1970.레이저 TV와 반도체 박막영상 “진공관”이 만들어낼 현실이다. 상자가 없는 것은 더 이상 TV가 아니며 이는 “비디오 환경”이라 불러야 한다.(252)
("지난 세기와 그 이전의 수많은 세기 동안, 교육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지성을 갖춘다는 것은 사실의 축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용하는 능력, 어떤 관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은 정보의 축적을 의미했고, 대중이 생각하는 지성이란 자신이 축적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하지만 그 사실들이 벽에 씌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앞으로 50년』(2002, 존 브록만 엮음)이라는 책에서 로져 샨크가「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후기이 에세이를 종이접시 발명자에게 헌정한다.영어 교정 : 칼린 린드그렌언젠가 월터 크롱카이트3)가 방송에 나와 이 한마디를 하고 사라질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굿 나이트, 체트4)!!”…………29분간의 공백과 침묵………… (253)
1) ᾕ은 틀린 글자입니다.『현대문학』의 원문(?)의 그 글자는 n위에 두 점이 찍혀 있지만 이런 모양은 아니어서 컴퓨터에서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2) Alexis de Tocqueville(1805-1859) : 프랑스의 정치사상가이자 역사가로 프랑스혁명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서를 남겼다.(역자 주).
3) Walter Cronkite : CBS 뉴스 앵커(역자 주)
4) NBC의 유명 뉴스 앵커였던 Chet Huntley(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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