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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Ⅱ

by 답설재 2009. 8. 18.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민희식 옮김, 육문사 1993

 

 

 

 

 

 

 

이제 나는 자살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어떤 해결책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인가는 이미 느꼈으리라. 이 시점에서는 문제가 거꾸로 되어 있다. 이전에는, 그것은, 인생이란 꼭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는 반대로, 인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럴수록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다는 게 분명해진다. 어떤 체험이나 어떤 특수한 운명을 사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고, 의식에 의해 밝혀지는 그러한 부조리를 어떻게 해서든 자기 앞에 간직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러한 운명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가 살아가는 기반이 되는 대립의 항목들 중의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거기에서 도피하는 행위가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철회하는 것은 그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영속적인 혁명의 주제는 개인적인 체험 속으로 옮겨진다.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부조리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조리를 응시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오르페우스의 아내. 오르페우스는 명령을 어기고, 아내가 뒤따라오는가를 보려고 뒤돌아보았다가 다시 아내를 영원히 잃게 되었다-역주)와는 달리,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돌아설 때에만 죽는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들 중의 하나는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 간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반항은 불가능한 어떤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매순간마다 새롭게 세계에 도전한다. 위험이 인간에게 의식을 붙잡을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듯이, 형이상학적인 반항은 의식을 경험 전체로까지 확대시킨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는 저 끊임없는 인간 현존이다. 그것은 열망이 아니다. 거기엔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반항은 어떤 짓누르는 운명에 대한 확신이지만, 거기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은 갖지 않는 확신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얼마만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자살을 반항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자살이 반항의 논리적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살은, 그것이 전제로 하는 동의(同意)에 의해 반항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자살은, 비약과 마찬가지로, 그 극단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면, 인간은 자신의 본래의 역사로 되돌아간다. 자신의 미래, 자신의 유일무이한 무시무시한 미래--그는 그것을 보고, 그리고 그것을 향해 뛰어든다. 자살도 그 방식대로 부조리를 해결한다. 자살은 바로 그 죽음 속에 있는 부조리를 삼켜버린다. 그러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부조리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부조리는, 그것이 죽음을 의식하는 동시에 거부하는 만큼 자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부조리는, 사형수가 최후의 생각의 극한에서 바로 그 아찔한 순간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이 바라보는 몇 미터 앞의 저 밧줄이다. 자살의 반대는, 사실상, 사형에 처해지는 인간인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는 자살할 것까지는 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