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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알베르 까뮈 『시지프의 신화』 1

by 답설재 2009. 8. 12.

알베르 까뮈 『시지프의 신화』

민희식 옮김, 육문사 1993

    

 

 

 

 

 

◦ 시지프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모든 신의 왕인 제우스Jeus는 아소포스Asopos 강의 딸인 아에기나Aegina를 유괴해갔다. 아소포스는 자기 딸이 누구에 의해 어디로 끌려갔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비탄에 잠겨 있었다. 그때 마침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시지프스는 코린트Corinth 성에 물을 대준다면 그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자신의 계획이 탄로 난 것에 화가 난 전능한 신 제우스는, 모든 신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시지프스를 처벌하기로 했다. 그의 형벌은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 가면 바위는 다시 굴러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번번이 결과는 마찬가지이지만, 시지프스는 그 일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 시지프스가, 그리고 모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길뿐이다. 자신이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린 바위가 다시 원점으로 굴러 내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 행위를 반복할 것이냐, 아니면 자살을 해버림으로써 시지프스의 운명에서 벗어날 것이냐. 여기서「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절박한 문제가 제기된다.

 

◦ 까뮈는 확고부동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살을 부정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근원적 사고와 삶의 바탕인 동시에 최후의 논리적․미학적 의미를 가능케 하는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자살은, 사는 것에 대한 이유의 부재와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무익함을 본능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자살은, 삶에 패배했음을 자백하는 행위이며, 의식을 눈뜨게 하는 부조리를, 인간에게 삶의 근거를 주는 가장 명백한 진리인 부조리 자체를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자살은, 비겁한 도피 행위이며, <나>와 <세계>의 대립에서 <나>를 말살함으로써 <세계>와의 대립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반면에, 사는 것은 부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 「이성과 정념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를 고무하는 일상적인 노력 속에서 부조리한 인간은 하나의 규율을 발견하게 되며, 그 규율이야말로 그의 힘의 원천인 것이다.」

이 노력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까뮈는 시지프스의 이야기를 동원한다. 시지프스가 신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죄는, 근본적으로, 그가 세상사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지만, 그 죄인은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희망도 안겨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형벌을 참고 견딘다. 시지프스는 두 손바닥과 뺨을 그 큰 바위에 굳게 붙여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면서,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 그 신들은 경험해본 적도 없는 어떤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 신의 섭리가 배제된 세계에서 숙명에 결박당한 의식을 지닌 존재, 자신의 인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바를 수행하는 가운데 행복을 찾는 의식적인 존재---이것이 부조리한 인간인 것이다. 까뮈에 따르면,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 비장한 항거의 응어리를 지니고 있다.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현재의 순간에 도취되어 미래에의 무관심을 키워간다.「부조리는, 인간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 까뮈의 부조리 사상에는 적극적인 휴머니즘과 상대적인 낙관론이 내재되어 있다.

 

 

번역본의 해설에서 옮긴 내용이다. 옮긴 일이 무성의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의 번역본이지만 문장이 잘못된 것 같지도 않고, 오탈자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끄럽지만, 전에 한번 읽었던 것을 다시 읽고 있는데도 그 내용을 인용하기가 어렵다.

 

역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다면 나는 그 역자가 구성한 문장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철학도가 아닌 '일반인'들도 많이 구입했을 이 번역본은 알베르 까뮈의 문명(文名)과 '시지프스'의 상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 '일반인' 중의 한 명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와 알베르 까뮈에 매력을 느낀 '일반인'.

 

연보(年譜)를 보면,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소설가․극작가․평론가로 1930년(17세)에 이미 알제리 수도 알지에의 알지에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전공했다. 1942년(29세)에 소설 『이방인(異邦人)』으로 문명을 떨쳤고, 1945년에는 연극 『Caligula』공연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51년(38세)에는 『반항인』출간으로 극좌파의 파상적인 공격에 이어 1년여의 긴 논쟁이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사르트르와 절교했다. 1957년(44세)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오늘날 인간의 의식에 제기되는 문제들에 빛을 던져주는 그의 작품 전체에 대해 이 상을 줌"이었다. 1960년(47세) 1월 초, 미셸 갈리마르(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의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언제 다시 세 번째로 이 책을 펼 수 있을까 싶어 책의 처음과 끝, 추론의 전개 논리에 대한 부분을 옮긴다.

 

 

단 한 가지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그러한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것이 된다. 그 밖의 모든 문제, 즉 세계가 3차원인가 아닌가, 정신은 여덟 개의 범주를 갖고 있는가 열두 개의 범주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다. 이러한 것들은 게임에 불과하다. 먼저 근본 문제부터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가 주장하듯, 존경할 만한 철학자라면 실례(實例)로써 설교해야 한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러한 대답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답에 따라 확고한 행동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실들이다. 그렇긴 하지만, 지성(知性)으로 분명히 알기까지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15쪽).

 

나는 그 산기슭에서 시지프스를 떠난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보다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쳐준다. 그 역시 모든 것은 좋다고 결론짓는다. 이제부터 주인 없는 이 세계가 그에겐 결코 메마르게도 헛되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바위의 원자 하나하나, 밤으로 가득한 그 산의 광석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그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가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164쪽).

 

이 에세이에서 전개되는 추론은, 개명된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정신적 자세, 즉 이성이 전부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정신적 자세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말해야겠다. 세계는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뒤라면, 그 세계를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정당하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끝까지 추적해내려는 추론과는 관계가 없다. 사실상 우리의 목적은, 세상의 무의미의 철학으로부터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와 깊이를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는 그러한 정신이 내딛는 발걸음에 빛을 비춰보자는 것이다. 그러한 단계들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 본질상 종교적인 것인데, 그것은 불합리의 주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역설적이고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분명 애초에는 어떤 주도적인 원칙도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에다 합리적인 이성들을 부여하는 그러한 단계이다. 어떤 경우에도 동경의 정신이 이룬 이 새로운 성과에 대한 관념을 밝혀주지 않고서는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결과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