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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학교는 망하지 않는다

by 답설재 2009. 7. 19.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도 망할 수 있습니다. 내 표현은 ‘망할 수 있다’는 정도지만, 나보다는 ‘한참’ 더 똑똑한 게 분명한 예일대학의 데이비드 갤런터David Gelernter는 아예 이런 생각입니다. “세계 대학의 95퍼센트는 50년 내에 사라질 것이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회가 오랫동안 ‘그래? 그러면 낡은 쓰레기라도 가르치는 게 낫겠군’ 하고 반응할 리는 없을 것이다. 사회는 ‘그래? 그러면 더 이상 영문학과는 필요 없겠군’이라고 반응할 것이다. 물론 초등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어제 방학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돌아간 다음 선생님들은 ‘면면히 이어온’ 우리의 전통대로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내가 내려갔을 때는 의례적인 전달사항은 이미 다 전달된 뒤였으므로 이제 ‘교장선생님 말씀’만 끝나면 해산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학교도 망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요즘 학원들은 심야교습 신고보상제(보도에 따르면 ‘학파라치’)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육은 국가기간산업입니다. 이걸 지금 공기업(학교)도 담당하고 사기업(학원)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봉급이 적어서 ‘신의 직장’은 아닙니까? 그렇지만 두고 보십시오. 우리가 이 모양이면 ‘학파라치’가 도와줘도 우리가 학원보다 먼저 망합니다. 사교육의 도움도 받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교육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끝내 잘못 가르친다면 학원에서라도 잘 가르쳐야 하겠지요. 부디 이번 방학동안의 연수가 여러분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근거에 대한 설명은 단순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한때 교사회의를 의결기구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던 바, 우리 학교에서는 그렇게 하자고 신신당부를 하는데도, 지시․명령에 의한 100점짜리보다 의사결정에 의한 70점짜리가 더 희망적이라고 애절하게 설명하는데도 ‘왜 회의를 하나?(화끈하게 지시․명령하면 분명하고 좋은데……)’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아이들의 자치회를 가르치는지, 회의는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며 대화와 타협이 도저히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지 못할 지경이면 어쩔 수 없이 다수결이라는 무지막지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회의라고 몇 번이고 일러주는데도 아직도 그 이치조차 터득하지 못한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는 그렇다고 칩시다. “우리가 언제 회의를 해봤습니까?” 한다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그것이 얼마나 어렵기에 국회의원들도 해를 넘기며 국민들의 온갖 지탄을 받고 있겠습니까. “회의가 전문인 국회의원들도 잘 못하는데 우리보고 왜 그러느냐?”고 한다면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제발 ‘전에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 의식 좀 바꾸자는 것입니다. 전에 하던 대로 ‘선행상’은 한 반에 두 명씩, 전에 하던 대로 부반장은 남녀 각 1명씩, 전에 하던 대로 무슨 작품 시상이든 뽑힌 아이는 모두 ‘우수상’, 전에 하던 대로, 전에 하던 대로……. 그러니까 수업인들 오죽하겠습니까. 교실에서 하는 활동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나는 ‘전에 하던 대로’에 질린 사람입니다. 질렸다기보다 그것 때문에 ‘죽을 맛’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부장교사들이 모인 교장실에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이렇게도 변하지 않을 줄 미리 알았다면, 콘크리트나 철강처럼 아주 굳어져서 그걸 내 힘으로 깰 수 없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나도 일찌감치 무슨 교원단체를 만들고 기필코 그 단체의 대표가 되어 아주 기세 좋게 이 한 몸 던졌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참다운 교육의 실현을 위해 미친 듯 활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현장에서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고치고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그러한 생각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40년 전 내가 처음 발령받았을 때 내 선배들이 나에게 보여준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그 신념을 41년째인 이 마지막 해에 와해시켜버리려고 작정을 한 것입니까! 왜 사람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듭니까!”

 

내가 이제 정년이 7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 되니까 못할 말이 없을 정도로 독(毒)이 오른 것일까요? 줄여서 말하면, 수업에 대해서는 교육부에서 보급하는 ‘교사용지도서’쯤은 우습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날이면 날마다 하는 수업인데. 덧붙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방금 회의실에 내려오기 전에 행정실장에게 방학동안 이런 현수막을 달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얘들아! 오늘 뭐 하니? 우리 도서관에는 재미있는 책이 많고 참 시원해!」어떻습니까? 이건 그저 2~3분만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굳어버린 가슴, 단단해진 머리를 부수어버리면 가능합니다. 공문이 오면 내거는 ‘불조심 강조기간’, ‘4월은 과학의 달’, ‘학교폭력 신고기간’, ‘학교폭력 없는 학교 우리 학교 좋은 학교’ 그런 것이 현수막입니까?”

 

학교는 망합니다. 이러면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게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 그 방법은 ‘학파라치’ 같은 건 아닙니다. 그건 참 소극적인 방법의 한 가지입니다. 적극적인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그 답은 귀가 닳도록 들은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책의 로저 샨크Roger C. Schank가 쓴 글「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대답되지 않는 질문들과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지능 측정의 요소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현재 대학에서는 잘 이해되어 있지만, 기업이나 정부에서는 사실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단순한 관점을 원하며, 교사들은 정답을 원하고, 기업은 해결책을, 벤처 투자가는 수익을, 언론은 전국적인 멜로드라마를, 인증기관은 점수를 원한다.”

 

교사들은 정답이나 원한답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께 -만약 이 글을 읽어보는 분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부디 이번 방학동안의 연수가 여러분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태여 어렵고 딱딱한 교육학 서적을 많이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때로 우두커니 앉아서 생각해도 좋고, 사회 사상에 관한 신문기사, 아무것도 아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봐도 좋고, 여행을 해도 좋습니다. 무엇을 하든 ‘지금의 나는 아무래도 진정한 내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나?’ 그런 생각을 가지면 가능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여일(如一)한, 작년 1학기 같은 한 학기를 지냈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가슴속에 문제가 가득한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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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이비드 갤런터,「빛살 속으로」, 존 브록만John Brockman 엮음․이한음 옮김,『앞으로 50년The Next 50 years』(생각의나무, 2002), 331쪽. 이 책은 존 브록만이 세계 최고 과학자들의 과학과 인간의 미래에 관한 25가지 글을 모아 엮은 책으로, 원서는 2001년에 나왔답니다.

2) ‘면면히 이어온’ 그 전통대로라면 그냥 ‘교무실’이라고 해야겠지요. 제가 이 학교에 왔을 때 그 방은 인테리어가 멋지게 된 교장실이었는데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기가 뭣해서 그야말로 ‘골방’ 같은 곳에 처박혀 있는 교감을 그곳에 있게 하고 간이용 탁자와 의자를 구입해서 회의실을 꾸몄습니다. 그러니 그 방의 이름은 당연히 ‘교감실’ 겸 ‘회의실’이 되었는데, 언젠가 교육청에서 보낸 공문 중에 ‘교감실’을 두지 말라는 게 있었습니다.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교감실을 두지 말라니요. 그럼 교감은 어디 있으란 말입니까. 그냥 ‘교무실’이라고 하란 뜻인가요? 요즘 학교에서 무슨 교무(敎務)를 봅니까? 학년 연구실도 다 있고 그곳에서 연구도 하고 학년업무도 다 처리하는데, 그럼 교무실에서는 누가 뭘 합니까? 당연히 ‘교감실’을 두어야지요. 그것도 좋은 방으로. 그래야 교감이 그 좋은 방에서 하루하루 그 많은 업무를 다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생도 많이 하고, 여러 선생님들도 만나야 한다면 방이 있어야 하고 그것도 아주 좋아야지요.

3) 제가 독(毒)도 올랐고, 살짝 어떻게 된 건 아닐까요? 「얘들아! 오늘 뭐 하니? 우리 도서관에는 재미있는 책이 많고 참 시원해!」그런 현수막을 보고 ‘살다보니 별 희한한 현수막을 다 보겠네. 교장이 살짝 맛이 갔나?’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설마 우리 아이들도 저를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보고 살아왔고, 제 눈에는 여전히 ‘그것들’뿐이니까요.

4) 정말입니까?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그렇게 잘 이해되어 있습니까? ……글쎄요.

5) 위의 책, 303쪽. 로져 샨크의 주장은 ‘대답 기반 사회에서 질문 중심 사회로’입니다. ‘대답 기반 교실에서 질문 중심 교실로’ 그렇게 고쳐 읽어보십시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