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나라도 교과서를 회수하여 상태가 좋은 책은 이듬해 학생들에게 다시 배부했었다. 자원절약이나 교육적 측면에서 바람직한 조치였다. 그러나 해마다 책의 내용이 수정되기도 하고, “내 아이가 왜 헌책으로 공부해야 하느냐?”며 당장 새 책을 구입해주는 학부모가 대부분이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교과서는 의무교육의 적용에 따라 공급 형태가 유상과 무상으로 결정된다. 또 의무교육이 적용되는 초․중학교라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한해만 쓰고 폐기하는 일회용 교과서를 ‘무상지급’하지만, 미국은 여러 해 사용하는 교과서를 ‘무상대여’하고 있다. 교과서에 사용자 기록표를 붙여 책임을 지도록 하고, 학년말에 교과서를 반납 받을 때 그 상태를 보고 ‘New, Good, Fair, Poor, Bad’로 나누어 훼손이 심하거나 분실한 경우에는 학생에게 책값을 물린다. 대여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미국 외에도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등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교육수준도 비교적 안정적인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우리나라도 초․중․고교 교과서에 참고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외형도 ‘선진형’으로 바꾸어 곧 교과서 무상대여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현재는 무상이든 유상이든 일단 학생이 교과서를 소유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그 교과서의 소유권을 교육청이나 학교가 갖게 하고 학생들이 빌려보고 반납하는 체제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교과부가 교과서대여제를 실시하려는 이유는 ‘교과서 가격 상한제’와 학교 자율화․다양화 방안의 일환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서 가격을 자율화하되 정부가 상한액을 제시하고 출판사는 그 범위에서 원하는 가격을 산정하는 규정이 확정되면 아무래도 교과서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므로 이 부담이 학부모들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최근에 발표된 학교 교육과정 자율화, 교과교실제 등의 정책을 뒷받침하려면 교과서 개혁부터 추진해야 하므로 교과서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도 대여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 교과서는 대여제 교과서에 비해 그 내용이 핵심을 중심으로 압축돼 있으므로 보관․운반이 용이하고 마음놓고 메모․기록할 수도 있지만, 교사의 설명이나 참고서 없이 교과서만으로 자율학습을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값은 저렴하다 하더라도 참고서 구입비와 일회용에 따르는 낭비적 요인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는 대여제가 더 경제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장단점 비교로 대여제가 좋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여제에도 장단점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조건은 교과서관(敎科書觀)의 변화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교과서의 두 가지 기능, 즉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수하는 기능과 지적발달을 자극하고 촉구해주는 기능이 조화롭게 작용하지 못하고 지식 전수 기능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교육과정 운영자료, 혹은 다양한 학습자료 중의 한가지라기보다 절대적인 지식을 담은 ‘성전(聖典)’ 취급을 받고 있으며, 이로써 우리 교육은 획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붕어빵 교육’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교과서관을 방치해놓고 당장 판형도 크고 부피도 2~4배에 달하는 방대한 교과서를 만들어 공급하게 되면, 교사가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학생은 그 설명을 경청해온 교육현장이 혼란에 빠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급한 행정가는 “참고서가 없이도 자기주도적 학습이 가능하다” “이제 교과서는 가정과 학교 사이를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 등을 강조하는 교사연수, 학부모연수를 강화하면 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과옥조형(金科玉條型)’ 교과서관이 우리 교육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이 고질병을 치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열망해온 우리 교육의 전체적인 일대 혁신의 핵심이 돼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교과서대여제는 당연히 잘 시행돼야 하며, 그러려면 철저한 연구와 준비가 필요한, 교과부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교육논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이 보이는 입학사정관제 (2009년 7월 23일) (0) | 2009.07.23 |
---|---|
‘미래형 교육과정’으로 그려보는 우리의 미래(한국교육신문 2009.7.13) (0) | 2009.07.13 |
미래형 교육과정과 우리 교육의 미래 (2009년 6월 24일) (0) | 2009.06.24 |
사교육대책이 조롱받는 이유 (2009년 6월 2일) (0) | 2009.06.02 |
학교자율화 방안, 낙관적인가 (2009년 5월 20일) (0) | 2009.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