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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대한 요구사항들

by 답설재 2008. 9. 12.

이 글은 2003년 6월 14일 저녁, 교육인적자원부에 근무하던 때 쓴 글입니다. 아마 토요일이었을 것입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사무실에 남아서 이 글을 쓴 기억이 있습니다(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편,『편수의 뒤안길』제5집(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4.1), 23~37쪽). 지금 읽어보니 글의 내용 중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곳도 있고 생각이 좀 변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녁의 기억을 한 장의 낙엽 같은 추억 하나쯤으로 생각하며 그냥 옮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역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11일에「이런 기사」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이 글이 생각나 여기에 옮깁니다.

 

 

 

 

교육과정‧교과서에 대한

이른바「국가‧사회적 요구사항」이라는 것에 대하여

 

 

 

 

1. “교육부에서 가장 까다로운 민원을 처리하는 곳이 편수다.” 우리 부에서 여러 부서를 거치며 일해 본 전직 편수관이 말했다. 당연하다. 왜 그런가 하면 이렇다.

 

• 편수에 관한 일은 장기간 괘도 수정이 불가능하다. 이미 전국을 대상으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교육과정 기준이 발표되어 있고, 적어도 1년은 그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과서가 공급되어 있으니 어떻게 쉽게 괘도 수정을 할 수 있겠는가. 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1년 후에는 쉽게 바꿀 수 있는가. 결정적인 오류라면 당연히 수정해야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바꾸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전에 배운 학생들은 엉터리를 배운 셈이 된다. 교육과정 기준이 우습게 된다. 모름지기 교육정책은 이래야 한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업무가 또 있는가.

 

• 증거가 만천하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신문이나 방송은 어제의 보도 내용을 오늘 찾아보아도 그리 쉽게 찾을 수 없다. 살면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교과서는 누구나 당장 펼쳐볼 수 있다. 그러니 적당히 덮어두고 그냥 가자고 할 수가 없다.

 

• 민원의 주체가 무한정이다. 학생, 교사, 학부모는 물론이고 관련 기관‧단체‧기업 등 거의 모든 국민이 우리에게 민원을 제기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셈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교과서에 관심이 있으니 국민의 대부분이 항상 민원을 제기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당장 ‘교과서를 고치자’ ‘교육과정에 반영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가 하는 일이 교육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 경험 없이는 처리가 불가능한 일이다. 편수에 관한 일은 교육에 식견이 있거나 눈치가 빠르다고 하여 당장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이다. 또한 담당자가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업무이다. 위로 상급자가 있다 해도 전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담당자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편수에 관한 한 경험자를 우대해야 하며, 장기간 근무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경험 없이도 잘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는 그런 요소가 거의 없다. 산전수전 겪으며 온갖 푸대접을 받더라도 오래오래 이 사무실에서 살자는 건 아니지만, 경험이 풍부할수록 일하기에 좋다.

 

7차 교육과정에 의한 국정교과서 개발비는 평균 3천만원이었다. 오늘날 정부나 기업에서 하는 일 치고 이만한 성과를 거두는 일이 어디에 또 있는가. 3천만원을 주고 할 수 있는 일이 국정교과서 개발 말고 또 있겠는가. 이건 다 우리에게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1).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육과정 정책도 그렇다. 199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걸핏하면 정부 업무의 지방 이양을 이야기해왔지만, 우리는 이미 1992년의 제6차 교육과정 때 국가기준은 ‘문서상의 교육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시‧도(지침)와 단위학교에서 ‘실천적인 교육과정’을 만들도록 하였다. 6차 교육과정 때의 그 정책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아서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이어져 이제 7차 교육과정에 이르러서는 시‧도와 단위학교의 역할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과정 정책이 10년이 걸려 성공적인 길을 가고 있다.「함께 만들어 함께 실현하는 교육과정」이라는 대전제를 모두 수긍하고 있다. 이것은 다 교육과정 정책에 관한 노하우가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영국도 이미 1980년대에 우리의 교육과정 정책을 벤치마킹하지 않았는가2). 그들도 역시 우리처럼 교육과정에 대한 현장의 비판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3).

 

2. 처음 편수 업무를 맡으면 혹 까불까불하거나 거드름을 피울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교과서 오류에 관한 소동을 한번만 겪어보면 당장 풀이 죽고, 제자리로 돌아가서는 똑바로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소동을 제대로 겪지 않은 사람을 보고 ‘아직은 믿기가 어렵다’고 평가하더라도 사실은 서러워 말아야 한다. 더구나 교과서에 관한 민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제7차 교육과정을 고시하고 나서 겪은 “교육과정 철폐”라는 어마어마한 민원을 겪은 것만 상기해도 될 것이다. 그렇게 설득하고 설명하고 현장에 다가가 함께 궁리하며 우리는 여기에 왔고 또 가고 있다.

 

 

3. 무용 교육 전문가들이 ‘무용’을 독립 교과로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들을 우리 과로 초청하여 그 주장의 배경을 듣고 교육과정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이미 국회 교육위원회 L 의원실에 그 요구를 담은 청원이 전해져 부랴부랴 답변서를 써 보냈다. 차관 면담 신청도 들어왔다. 우리 과로 온 첫 서류가 차관 면담 요청이었다. 교육혁신위원회를 경유한 청원서도 왔다.

 

청원서를 살펴보았더니 주체는 ‘무용교과독립추진위원회’로 되어 있고, 참여 단체는 다음과 같았다. 대한무용학회, 한국무용협회, 한국무용교육학회, 한국발레협회, 한국초등무용교육학회, 현대무용협회, 한국발레연구학회, 한국현대무용진흥회, 한국춤평론가회, 한국무용연구회, 미래춤학회, 현대춤협회, 한국무용예술학회, 현대춤연구회, 무용‧동작치료학회, 전국직업무용단연합회, 한국무용과학회, 전국무용학원연합회, 한국무용기록학회, 전국예술중‧고등학교무용교사연합회, 한국무용사학회, 전국초‧중등무용교사연구회, 이상 무용 관련 22개 학‧협회 및 전국 50개 대학 무용학과. 무용에 관한 단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줄 몰랐다. 그대로 말하면 우선은 기가 질렸다4).

 

첨부물로 ‘무용 교과 독립 정당성 관련 자료집’이 있어 목차를 보았더니 1. 무용 교과 독립의 정당성, 2. 무용 교과 독립을 위한 제1차 심포지움 자료(‘무용 교육, 이대로 좋은가?’), 3. 무용 교과 독립을 위한 제2차 심포지움 자료(‘무용 교육 현장  보고‘), 4. 결의문, 기구표, 5. 무용 교과 독립 활동에 관한 기사 자료로 되어 있다. 읽어보나마나 주장하는 측의 관점에서는 무용을 독립 교과로 정해야 할 당위성이 충분할 것이다.

 

현재의 교육과정 기준으로 보면 ‘독립 교과’란 대한민국에 태어난 초‧중‧고 학생들은 누구나 모두 필수로 배워야 하는 교과를 말한다. 말하자면 무용을 국어나 수학, 음악처럼 1년에 34시간 이상 필수로 가르치고 배우게 해야 하는 것이다.

 

4. 사실은 ‘무용’도 이미 ‘독립 과목’으로는 되어 있다. 즉 고등학교 전문 교과 편제표를 보면 체육에 관한 교과 중에도 ‘무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에 관한 교과에는 무용이론, 무용사, 동작분석,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민속무용, 무용음악, 무용창작, 무용감상 등 10개 과목이 편성되어 있다. 이러한 과목은 원하는 학생이 있을 경우 어느 고등학교에서나 가르쳐주는 것이 원칙이나 대체로 체육고등학교나 예술고등학교 등 특수 목적 고등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다.

 

5. 무용교과독립추진위원회에서 이걸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의 주장은 사실은 이렇다. 고등학교 2․3학년은 물론 초‧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에 편성되어 있는 체육 교과의 무용 영역은 무용 교육에 전문성을 가진 무용 교사를 양성하여 그들이 무용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무용이 체육 교과의 일부로 편성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교원 양성 대학에서 체육과 함께(그 대학에서는 물론 무용을 체육의 한 영역으로 간주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무용도 배운 체육 교사가 무용을 포함한 체육 교과 전체를 가르치고 있다. 만약 무용 교사 자격증을 주게 되면 그 교사들은 무용은 가르칠 수 있지만 체육은 가르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좋다면 무용 교사 자격증을 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무용 교사 자격증을 줄 경우 그들은 무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특수 목적 고등학교에 가서 무용만 가르치면 그만이다. 자격증을 주면 그들은 순순히 그렇게만 하겠는가. 사실 그들의 더 절실한 주장은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용을 독립 필수 교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무용은 체육이 아니고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미국처럼 연극을 포함한 네 가지를 예술 교과로 편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용은 예술의 한 장르이다. 분명하다. 그러나 장르가 다르다고 다 필수 교과가 되어야 하나. 교육과정의 구조는 저학년에서는 통합 지향적이고 고학년으로 갈수록 분과 지향적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저들은 자기네의 요구가 절대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필수 교과가 몇 가지가 되어야 하나. 가령 예술 교과를 두는 미국은 필수 교과가 6,7개 교과이므로 그렇게 하자면 현재의 우리나라 10개 필수 교과 중에서 당연히 몇 개 교과는 없애야 한다. 음악, 미술, 무용, 연극을 묶어서 예술 교과로 하면 된다고 한다. 참 간단한 것 같지만 음악, 미술 교과의 세력은 가만히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무용, 연극말고도 필수 교과목을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있다. 국어, 도덕, 사회, 수학, 과학, 실과, 체육, 음악, 미술, 외국어(영어) 중에서 누가 한번 1개 교과라도 빼내는 지혜나 용맹성을 발휘해 보기 바란다.

 

6. 제7차 교육과정은 한때 현장 교사들이 “적용하기 힘든 교육과정이므로 폐지하라.” “유보하라.” “수정 고시하라.” “수준별 교육과정이라도 폐지하라.” “선택중심 교육과정이라도 폐지하라.”는 강한 비판을 많이도 받은 교육과정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거의 누구나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쯤은 알게 한 교육과정이다. 이 교육과정의 편성‧운영 지침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제시되어 있다.

 

“민주시민교육, 인성교육, 환경교육, 경제교육, 근로정신함양교육, 보건교육, 안전교육, 성교육, 소비자교육, 진로교육, 통일교육, 한국문화정체성교육, 국제이해교육, 해양교육, 정보화 및 정보윤리교육 등 범교과 학습은 재량활동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지도하되, 관련되는 교과와 특별활동 등 학교교육 전반에 걸쳐 통합적으로 다루어지도록 하고, 지역 사회 및 가정과의 연계 지도에도 힘쓴다.”

 

얼마나 멋진 지침인가. 이런 것을 모두 교과로 만들면 되겠는가. 각 학교에서 판단하여 필요한 요소를 강조하여 가르치면 된다. 가르칠 시간까지 초‧중‧고 각각 주당 평균 2시간씩을 책정해 놓았다. 교육과정에 제시된 이 15가지 사항들은, 멋지기만 한 지침이 아니라, 비록 각각 교과목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지만 모두 얼마나 중요한 교육 요소들인가. 나는 1997년 12월말에 이 교육과정이 고시될 때만 해도 ‘항목 수로 보나, 지침에서 언급한 가르치는 방법으로 보나 이 부분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는 어지간히 반영했으므로 이제 다음 교육과정 개정 때까지 이대로 하면 되겠구나.’ 했다.

 

7. 그러나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이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를 만들어 나가는 동안 다시 새로운 요구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2001년도 1종도서 편찬추진계획」을 보면, 장애인에 대한 이해(보호와 동정의 차원을 넘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의식), 양성평등교육, 인권교육, 관광교육, 반부패교육, 재해대비교육의 6가지가 새로 등장하였다. 그러니 항목 수로 보면 이제 21가지가 된 셈이다. 도대체 몇 가지로 늘어나면 제대로 된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게 될까. 늘어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교과서에 대한 요구들은 이처럼 끊임없다는 뜻이다.

 

8. 그런데 새로 등장한 항목들 중에서도 ‘반부패교육’과 ‘재해대비교육’은 특히 강조되어 위에서 이야기한 교과서 편찬 추진 계획을 보면 ‘반부패교육은 민주시민교육, 인성교육, 민족문화정체성교육과도 관련을 가지며 반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부패교육을 강조하는 교과목에서는 적절한 소재(실천적, 구체적인 사례)를 선정하여 싣고, 지도서에는 이에 관한 생생한 예화 등 지도자료를 제공하여 실제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 ’재해대비교육은 안전교육과 관련을 가지며 반영할 수도 있다. 지진, 홍수, 가뭄, 재해 발생 시 대비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한다.‘고 제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 두 가지는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라고나 할까.

 

9. 사실은 그 21가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관련 전문가들이 만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보건교육만 해도 ‘독립 교과화(化)’를 요구하는 토론회를 개최하여 우리 과 L 장학관이 나가서 교육과정의 구조를 설명하고 독립 교과화 문제는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 논의해야 할 사항임을 밝혀 어느 정도 이해를 구했지만 그러한 요구가 말끔하게 해소된 것은 아니다. 보건 교육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난봄에는 흡연 예방 및 금연 교육이 정규 교육과정으로 편성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의 세미나도 개최되었다.

 

10. 교육과정‧교과서에 반영되기를 요구하는 사항들은 너무나 많고 다양하다. 지난 3월에 나타난 요구들만 대충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려운 교과과정이 사교육 불러(3. 10. 조선일보 독자)

․세계사‧국사 과목 통합을(3. 10. 한겨레 논단)

․교육청 등 교육당국이 교육과정의 자율화를 유도해야 한다(3. 10. 한겨레 인터뷰 기사)

․전국 초‧중‧고에 안전교사 배치하고 교과과정 신설도 추진(3. 12. 문화일보)

․제대로 제시된 교육과정과 평가가 없는 것이 불평등 조장(3. 12. 조선일보 독자)

․영어 교과서 오류 방지를 위한 국립영어교육원 설립 요구(3. 12. 개인 민원)

․안전 교육 강화 및 교련 교과 명칭 변경 요구(3. 13. 개인 민원)

․교과서 게재 저작물의 저작자 표시 요청(3. 14. 한겨레 독자)

․교과서 번역 작품 오류 지적(3. 15. 조선일보 일사일언)

․교과서 게재 작품 저작권 침해 지적(3. 15. 개인 민원)

․바른 호칭어 수용 요청(3. 17. 개인 민원)

․교사 수 부족 등으로 고교 선택과목 수업 파행(3. 19. 동아일보)

․‘친일 윤전기’ 철거, 다음은 교과서(3. 19. 한겨레 사설)

․고대사 식민사관 벗어날 계기, 풍납토성 발굴로 국사 교과서 수정 불가피(3. 19. 문화일보)

․금융 교육 관련 내용의 교과서 수록 요청 : 신용 불량자 증가 사회 문제로 이슈화(3. 20. 금융감독원 간부 장관 방문)

․고용‧산재보험제도의 교과서 게재 요청(3. 24. 노동부 공문)

 

11.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상대의 ‘성격’을 보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데 열중한다. 어처구니가 없을 때도 있으나5), 차근차근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 할 경우에는 일단 담당자에게 넘기기도 하고, 내가 시간을 내어 차근차근 설명하기도 하고, ‘이건 들어볼 만하고 즉시 반영해야 하겠구나.’싶으면 자세히 듣기도 하고, 때로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대상은 교육과정이 무엇인지, 교과서가 무엇인지 잘 알만한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평소에 쌓이고 쌓인 분풀이를 하는 셈이다.

 

12. 분풀이6) ① : 모든 사람들이 모든 걸 초‧중‧고 기본 과정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기에 가르쳐야 ‘효과가 만점’이라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여류작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체주의가 우파든 좌파든 모두가 교육에 열심인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두뇌 형성기야말로 승부를 걸 만한 곳이다. 그 기간에 어떤 종류의 공기를 충분히 마시게 해두면 나중에는 걱정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쇠뇌공작이다.’7)

 

 

13. 분풀이 ② : 자기의 주장을 들여대는 사람들 치고 외국의 사례를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걸핏하면 미국이고 영국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외국 사례를 모아 우리나라 교육과정에 모두 도입하면 학교에서는 아예 아이들을 집에 보낼 수도 없게 되고, 하루 24시간 내내 가르쳐도 다 가르칠 수 없게 될 텐대요? 그래도 좋을까요?” 시오노 나나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이런 외국 노망의 특징은 자국 노망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그 나라 ‘실정’에 파묻힌 탓에 다른 나라 사정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외국의 여러 가지를 거울삼아 자기 나라의 여러 가지를 탓하는 종류의 논조가 한때 매스컴을 석권했다. 그때 방식으로 재미를 본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그 잔영에 끌려다니고 있다.‘8)

 

14. 분풀이 ③ : 내가 보기엔 그동안 자기네 할 일이나 부지런히 하던 기관‧단체들이 교과서부터 고치자고 모두 일어나 외치는 것 같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은 국민으로부터 대표성을 부여받은 헌법기관입니다. 이런 기관을 시민단체가 개혁하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들이 좋은 제도적 개선을 제의하거나 청원하면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중략)…. 우리나라에서 시민단체는 만병통치약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 또한 문제가 있다고 나는 봅니다.”9)

 

15. 분풀이 ④ : 金基奭10)은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지식은 사회적‧역사적 구성체’라고 전제하고, 교육과정의 ‘현실적 분석은 사회적 理論 가운데 意思決定 觀點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결정 관점에서 본 교육과정 개혁 과정은 일종의 政治的 過程’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집단은 理念이란 知的 象徵을 조작하여 그들의 이해를 보호하거나 地位를 계속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지식을 선정, 조직하여 교육내용으로 전환시키고 있는데 그 결과가 교육과정의 개혁으로 나타난다’고 하고 ‘교육과정 개혁은 따라서 사회통제방식의 구조적 변화를 위한 시도’라고 하였다11).

 

교육과정도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어느 모로 보나 우세한 세력의 주장은 그만큼 큰 힘으로 반영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러한 주장은 가장 객관적‧논리적‧보편적‧중립적이어야 할 것 아닌가. 가령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참사로 보아 안전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여 어느 학교에서 오늘도 내일도 허구한 날 안전 지도만 하고 있다면 그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 치고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하겠는가.

 

16. 분풀이 ⑤ :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은 우선 견해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동기, 우려를 충분히 파악해 그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능하다."12) 그러므로 교육과정‧교과서에 대하여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하나하나 이해시키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나중에 보자고 미뤄두기도 하면 될 것 아닌가? 라고 하겠는가.

 

“……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중략)…“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을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하다가는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란다,는 얘기인가요?” …(중략)… “나는 그런 것을 적당하게 웃어넘길 수가 없어.”13)

 

17. 분풀이 ⑥ :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경향을 찾기가 힘든다. 대부분 자기네가 전공하는 영역, 자기네가 하는 일과 직접적 연관을 갖는 영역에 대한 요구일 뿐이다. ‘교육과정’이란 우리가 믿으며 갈 대상인, 우리의 저 학생들이 이룩할 우리의 꿈을 비춰주는 거울이다14).

 

18. 분풀이 ⑦ : “교육과정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며, 그것이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처음으로 종합적인 이론적 모형을 제시한 사람은 타일러(Ralph W. Tyler)이다. 그는 1949년에「敎育課程과 授業의 基本原理」(Basic Principles of Curriculum and Instruction)라는 조그만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 속에서 타일러가 제시한 교육과정 이론이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여, 시간적으로는 이 책이 출간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거의 전 세계에 걸쳐서, 사람들의 교육과정에 관한 사고를 지배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敎育課程의 古典模型으로서 군림하여 왔다.” “그는 교육과정이나 수업계획을 편성할 때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다(Tyler, 1949, p.1). 즉, ①학교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교육목표는 무엇인가? ②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학습경험의 선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③이러한 학습경험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④교육목표의 달성 여부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타일러가 제기한 질문이다.”15)

 

교육과정에 “이것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책 좀 보고 그런 주장을 하면 더 좋을 것이다. 마침 위에서 인용한 책은 참고문헌까지 합하여 65쪽밖에 되지 않으니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테니까. 단, 그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자기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답한다면 근처에도 오지 말기를.

 

 


1) 한번 국정교과서 개발과정과 절차를 나타낸 표나 그림을 구해 분석해 보라. 이 작업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편수 담당자는 그러한 과정, 절차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짐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2) 1986년, 대처 수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H호텔에서 당시 문교부장관(손제석)을 면담하였다. 그 상황을 픽션화해보면 이렇다.

  대처 : "한국의 학생들이 국제학력경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고, 또 콩나물 교실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관 : "귀국에는 학교교육평의회, 너필드 재단 등 전문기관이나 민간 교과서 출판사, 영국방송공사 등에서 만든 교육과정을 각 학교에서 채택하여 적용하고 있지만, 우리 한국에는 교육과정 국가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하여 전국적인 공통기준으로 적용해 왔으며, 현재 제5차 교육과정 개정 중에 있습니다."

  '다시 영국의 지중해 시대를 열자'며 국가경쟁력 제고의 길이 교육에 있다고 한 대처는 이 말을 듣고 돌아간 지 2년만인 1988년, 교육의 질적 수준제고를 위해 ’교육개혁법안(Education Reform Act)‘ 제정하였고, 이와 함께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과정 국가기준(NATIONAL CURRICULUM)을 만들었다.

 

3) 영국의 기준은 '가능한 한 기준을 지키자'는 선언(권장)의 의미이고, 우리의 기준(교육인적자원부장관 고시)은 '지켜야 한다'는 규정의 의미인데도 영 연방국의 교사들은 국가기준을 정하는데 대해 반발하여 중앙과 주 정부에서 교사들을 설득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인용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국가 교육과정의 도입을 앞장서서 반대했던 영국의 세계적 교육과정 학자인 데니스노턴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귀하가 반대하던 국가 교육과정을 정부가 채택했다. 귀하의 향후 입장은 무엇인가?”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결정이 날 때까지 논의하는 동안에는 반대했지만, 이제 그것이 결정된 이상 자랑스러운 영국의 국가 교육과정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내 입장이다.”

 -곽병선,"제7차교육과정에대한시비로우리교육을어떻게하자는것인가?",한국교육과정평가원,「교육광장」2000, 12월호 권두언.

 

4) 누가 또 다른 하나의 무용 관련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고 치고 이미 있는 단체의 이름과 겹치지 않도록 그 단체의 이름부터 한번 지어 보라. 무용만 그런 줄 아는가, 천만에. 그러나, 이런 일로 왈가왈부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그 얼마나 신선(신성)한 일인가.

 

5) “여러분, 부자 되세요!”의 경우가 바로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나, 오늘날 이 한마디는 얼마나 바람직하고 신선하고 깜찍하고 …… 그렇게 들리는가. 기업의 역할은 어떤가. 경기가 좋을 때는 모름지기 기업은 이윤 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 복지 사업에도 힘써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만약에 교과서에 그런 내용이 없으면 당장 지적될 것이다. 그러나 IMF니 뭐니 하여 경기가 좋지 못하면 기업의 역할에 대하여 교과서에는 이윤 추구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된다. 경제 전문가가 보기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경제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볼 때는 그렇다. 신용 카드가 처음 나왔을 때는 이것은 돈처럼 쓰인다는 것만 들어가도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신용 불량자가 3백 몇 십만이 되자 교과서에 신용 카드를 잘못 쓰면 큰일난다는 내용이 왜 없느냐고 묻는다.

 

6) 이 분풀이는 결코 무용 필수교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어디 그들만 그렇게 하는가. 가령 초등학교 무슨 교과서에 경찰은 시민의 지팡이라는 내용이 열두 번이나 나왔다면 경찰이 우리를 잡아가겠나. 우유에 대한 내용이 건강이나 식품을 다루고 있는 무슨 교과서에 5쪽이나 나왔다면 너무 많다고 농수산부에서 우리에게 항의를 하겠는가. 그러면 사회 교과서에 금융 관련 내용이 5~6%가 아니라 50~60%라면 금융감독원에서 찾아와 “왜 이리 많이 넣었느냐?”며 우리를 감독하려 들겠는가. 또 그 사회 교과서의 4개 단원 중 1개 단원이 온통 국회에 관한 내용이고, 다른 세 단원 중 1개 단원이 법원에 관한 내용이라면 국회와 법원에서 우리를 불러 “좀 심하지 않느냐?”고 하겠나. 요즘은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기관이 우리 앞에 더 나서는 것 같지만, 무슨무슨 수많은 시민 단체들-NGO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면 더 적극적이고 더 일을 잘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그 힘센 압력 단체들-은 요즘은 어디 가만  있는가. 그러니 이 분풀이는 교육과정‧교과서에 자기네가 하는 일을 “넣어야 한다.” “더 많이 넣어야 한다.” “강화해야 한다.”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분풀이다.

 

7) 시오노 나나미, 이현진 옮김(1998),『사일런트 마이노리티 - 침묵하는 소수의 음향과 분노』(한길사, 1998), 200.

 

8) 시오노 나나미, 이현진 옮김(1998), 위의 책, 172.

 

9) 직격 인터뷰 : 박관용 국회의장,「월간중앙」, 2003년 4월호(125쪽)에서 옮김.

 

10) 교육과정이 무엇인지 알지만 시시한 말은 잘 하지 않고 크게 보며 연구에 몰두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중 한 분.

 

11) 김기석(19??),「교육과정 개혁과정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교육과정전공 석사학위논문), 90~92.

 

12) 알베르트 아인슈타인․홍수원, 구자현 옮김,『아인슈타인의 나의 세계관』(중심,2003), 181.

 

13) 무라카미 하루키․김춘미옮김,『해변의카프카』(문학사상사,2003), 351~352.

 

14) The curriculum is mirror that reflects America's dreams for its next generation. It is through the school curriculum that Americans attempt to translate their values into reality. Therefore, no area of this nation's schooling has such a difficult, complicated, and dramatic history as the school curriculum. - Arthur K. Ellis, James A. Mackey, Allen D. Glenn(1988), The School Curriculum, Massachusetts : Allyn and Bacon. P. 3.

교육과정은 미래 세대에 대한 미국의 희망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 미국인들이 우리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시도는 학교교육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 미국의 학교교육에서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학교 교육과정처럼 복잡하고 복합적이며 극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

 

15) 李鍾昇(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충남대학교 교수),『TYLER 敎育課程과 授業의 原理』(교육과학사, 1990년 중판), 3~4쪽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