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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교과서에 대한 인식전환의 필요성

by 답설재 2008. 7. 30.

 1980년대에 몇 년간 교육부 편수업무를 돕던 나는, 1993년 6월에 편수국 교육연구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편수국은 국장아래에 편수관리를 맡은 서기관실, 교육과정담당관실, 인문과학편수관실, 사회과학편수관실, 자연과학편수관실로 나뉘어, ‘편수관’으로 불리는 6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지금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나는 몇 달간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 초등학교와 유치원 교육과정 일을 하다가 곧 사회과학편수관실로 옮겨 초등학교 사회과 편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는 지금은 되돌아보기조차 무서울 정도여서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하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사회과 편수관으로서의 자부심, 책무성은 가히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그렇게 생활하던 1996년 여름에 한국2종교과서협회의『교과서연구』제25호에 투고한 글인데, 지금 보니 흡사 교수요목(敎授要目) 시대의 문장처럼 거칠기 짝이 없으나 나로서는 그 시절을 회상하기에 충분하고, 그러한 기상과 자부심으로 사회과를 연구하는 교원들의 앞장을 섰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기도 합니다.

 

 

 

교과서에 대한 인식전환을 기대하는 고언(苦言)

-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를 중심으로 -

 

 

 

□ 교과․교과서를 가볍게 보는 분들께

 

교육을, 더구나 기본․기초교육으로서의 초등학교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교육과정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정하거나 고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큰 교통사고가 나면 초등학교 때부터 운전을 가르쳐야 한다는 민원을 내고, 산업재해가 일어나면 안전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대학 강사가 재산 때문에 심지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면 인간의 심성을 착하게 하는 종교교육을 교과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느 공장에서 몰래 약품 섞인 폐수를 방류하여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환경문제가 일어나면 환경교육이 부족하다고 원망한다. 그런 사람들은 거리에서 가령 스리랑카 사람을 만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곤경에 처한 경험을 했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당장 스리랑카 어를 가르치지 않고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할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고 있을 즈음 초등학교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건들이 연일 사회면의 굵직굵직한 기사로 등장하고 있으니, 곧 성교육을 정식으로 교과화하자는 주장들이 뒤를 이어 등장할 것이 번한 일이다.

 

한마디로 초등학교 교과, 교과서는 그렇게 다루어지는 교과, 교과서가 아니고, 초등학교 교육은 그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선 정신을 차려야 하고, 침착하게 교과화(敎科化) 여부를 이야기해야 한다.

 

 

□ 교과서가 어렵다는 분들께

 

흔히 초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이 어렵다고들 한다. 제6차 교육과정에 따라 새로 나온 교과서는 훨씬 쉬워졌는데도(그래도 어렵긴 어렵겠지만), 새 교과서를 구경하지도 않고 그냥 어렵다고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초등학교 교사도 아닌, 대학교수이거나 어떤 기관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나도 모르는 것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더라.”고 한다. 잘난 체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가 초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을 다 알아야만 하는지, 예를 들어「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가요가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실렸고, 그가 그 가사를 다 외우지 못한다면 어른으로서의 자격이나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로서의 자격에 손상이라도 생긴다는 뜻일까. 또 그런 사람이 중학교 교과서 내용을 다 외우지 못하는 건 그럼 당연한 일이라는 뜻일까.

 

그런 사람들은 입으로는 교육개혁을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옛날 그가 국민학교 시절에 교과서에 쓰인 것들을 모조리 다 외우던, 적어도 교과서에 쓰인 것은 개념이거나 주요 사실이거나 그러한 개념을 알게 하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 사실이거나 간에 다 외워 버리던 지식주입식 암기교육 시대의 교과서관(敎科書觀)에 물들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늘 강조하여 말하듯 이미 시대가 변한 것을, 그는 자신부터 깨달아야 한다. 오늘 초등학교 교사들은 이미 옛날처럼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교과서에 우리 고장의 생활상으로 가령 ‘안산’의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면 교사는 그걸 보고 실제로는 우리 시․군을 가르친다. 교과서에 쓰인 그대로 읽고 밑줄 치고 쓰고 외우는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 독도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동원하여 ‘독도는 우리나라의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섬으로 바위가 많아서 사람이 살기에 어렵지만, 우리나라를 지키고 고기잡이를 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실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교과서에 제시된 어떤 탐구과제에 대해서는 온갖 자료를 동원하여 외롭고 긴 탐구여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이런 경우 그 학생이 그 과제와 관련하여 알게 되는 구체적 사실들은 얼마든지 다양하고 깊이 있는 것일 수 있으므로, 그런 학생에게 “넌 초등학생이니까 그런 탐구는 그만두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그러나 초등학생은 그런 공부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의 자녀가 그렇게 공부한다면 “내 아들은 확실히 똑똑하다. 요즘 아이들은 그렇다는 것을 교사들은 모른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 초등학교 교과서는 만들기가 쉬울 것이라는 분들께

 

교과서는 논문집이나 소설, 혹은 월간잡지와 다른 특수한 절차에 의해 만들어지는 책으로, 지난 시절 편수국에서는 그 절차를 50단계로 나누어 추진하였다. 특히 사회과 교과서는 교과의 특성상 이와 같은 일반적 절차를 밟는 데 있어 매우 치밀해야 하고, 새 교과서를 편찬할 때는 교육부나 개발기관 담당자가 게으른 것도 아닌데, 항상 다른 교과에 비해 작업이 늦어지곤 했다.

 

특히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문장은 동화나 논문을 잘 쓴다고 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중․고등학교 교과서 문장과도 전혀 다른 관점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그것은 생활경험이나 구체적 사실, 이야기, … 속에 마치 당의정처럼 개념을 담아야 하는 제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 교과서는 사실상 국어과 교과서처럼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단정하며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더구나 초등 사회과 교과서는 간략하게라도 수많은-세상의 거의 모든-사상(事象)을 담을 수 있으므로 어휘구사도 능숙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는 전문가는 일찍이 수학이나 논리학을 배우고 소설이나 시를 웬만큼 써본 경험을 가진 후 비로소 그런 분야를 포기하고 사회과 교육을 전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적격일 것으로 보인다.

 

 

□ 교과서 편찬에 참여하는 분들께

 

이제 교육부 편수국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 기회에 좋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생각해온 것들을 모두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그건 비중 있는 분들의 격식을 갖춘 글이어야 할 것이므로 이대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만 덧붙이고자 한다.

 

교과서 편찬위원 속에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정열을 지닌 한두 사람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는, 친구와 가족에 대한 소홀함을 마음속으로만 미안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교육을 통하여 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고, 개인의 자아가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교과서에 대해 그의 전문성을 실무로써 보여줄 수 있어야 하므로, 스스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는, 사회사상의 변화를 교과서에 담긴 구체적 사실 속에 즉시 반영하기 위해 ‘보초’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 교과에 관련되는 온갖 문헌과 자료를 늘 부지런히 모으고 읽어야 하므로 그의 서재는 ‘잡서(雜書)’들로 가득차야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몇 가지의 신문을 보며 참고가 될 기사를 스크랩해야 한다. 가령, 영종도에 건설되는 국제공항의 이름을 대충 써넣을 수는 없다. 한때 우리가 “남대문, 남대문”하던 그 남대문이 어느 날 “숭례문”으로 그 본명을 찾게 되었으므로, 모든 것이 정말로 그런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의무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사람은 거의 없고 알쏭달쏭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렇다고 관련 기사가 게재된 날짜도 모른 채 확실한 자료를 찾겠다고 하루치만 해도 수십 면인 신문철을 뒤적일 수도 없다. 그는, 이처럼 사소한 일에도 열중하는 생활에 긍지와 보람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학생들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일임을 자부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