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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독도(3) - 교과서의 글「독도 의용 수비대」

by 답설재 2008. 7. 21.

 

신문에서 다음 기사를 봤습니다.「초등 교과서에 2011년에야 ‘독도’ 실린다-6학년 사회 교과서에」(조선일보,2008.7.18,10면). 읽어보셨으면 건너뛰십시오.

 

2011년부터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 독도에 관한 내용이 실린다. / 17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해 초 고시된 2007년 교육과정 개편안에 따라 최근 발행된 교육과정 해설서 중 초등 6학년 사회과 교육과정에 독도 관련 내용을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인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 훼손 시도의 부당성을 깨닫게 한다’는 내용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설명하는 부분에 포함된다.교육과정 해설서는 새로 개정된 교육과정의 목표와 방향, 내용 등을 일선 학교 교사와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자세히 알리기 위한 일종의 지침서이기 때문에, 실제 교과서에도 관련 내용이 반영된다. / 현행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국토 사랑’을 강조하는 학습자료로 독도의 사진만 실려 있고, 독도에 대한 본격적인 기술은 중학교 교과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최수현 기자    paul@chosun.com

 

 

1996년 가을이었습니다. 정부중앙청사 18층 ‘편수국’은, 그해 봄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정부직제개편에 따라 힘없고 한 많은 그 이름조차 없어지고 ‘교육과정정책과’로 줄어든 상태에서 그래도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각오만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비실에서 손님이 기다린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초로(初老)의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자해 보이고 몸집이 넉넉해 보이고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분이었습니다. 얼른 차 한 잔을 시켰는데, 찻값은 꼭 자신이 내야 한다기에 그러라고 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고 홍순칠 대장의 아내 박○○라고 소개하고-지금은 그 성함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다짜고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남편 홍순칠 대장은 지하에서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을 제대로 감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도 교과서 편수업무를 맡은 편수관들이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일을 연구․개발기관에 맡겨놓은 채 두 발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날마다 쉬기만 했고,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연구․개발기관 학자들 심부름이나 했고-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부(교과부?)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그러나 그게 더 중요한 능력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육부 근무 경력을 징검다리로 삼아 각 시․도에서 더욱더 높은(?) 직위로 상승하는 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까칠한’ 저 같은 사람은 연구․개발기관에서 하는 일이나 교과서 원고가 걸핏하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다시 하라”고 했고 아예 밤을 새워 제가 새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때의 교과서를 펼쳐보면 제가 쓴 원고를 다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독도 의용 수비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홍순칠 대장의 부인 박 여사는 그날 제게 한 가지 선물을 주고 돌아갔습니다. 언제 시간이 된다고 연락하면 독도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독도는 아무나 가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만 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그분의 성함도 연락처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1999년 가을, 서울의 어느 학교 교감으로 나가 있을 때-교감은 서울에서 하고 왜 교장을 서울에서 하지 않고 경기도로 나왔는지 누가 좀 물어봐 주십시오.-해군의 독도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독도를 다녀왔습니다. 우리 일행은 포항에서 경비정을 타고 울릉도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독도로 향했는데(저는 토하지는 않았지만 멀미는 심하게 했습니다), 그날은 재수가 아주 좋아서 파도가 높지 않아 배가 독도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동도 선착장에 내려 해발 90여 미터의 봉우리를 돌아내려온 그날 그 꿈결처럼 아름다운 시간을 저는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독도는 그 길을 오른 경험이 없는 분에게는 그 아름다움과, 그 멋스러움과, 그 가슴시린 느낌을 설명해봐야 헛일일 정도입니다. 저는 지금 홍순칠 대장의 부인께서 독도(동도) 정상의 그 길을 걸은 추억을 제게 선물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홍순칠 대장의 부인께서 읽고 제게 고마움을 표시한, 교과서의 그 글을 한번 보십시오.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교과서에는 없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의 경우 1996년 가을부터 2000년 가을까지 적용된 제6차 교육과정에 따른『사회과탐구』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독도(2)-교과서와 독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월간조선』1995년 신년호 별책선물『피․땀․눈물로 쓴 해방 50년 우리 시대의 내용증명-한국인의 성적표』중에서 金秉烈(전 독도의용수비대원)의「일본에게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는 忠義로 독도를 지켰다」는 글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새로 쓴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만큼 쓰면 감동적이겠지 싶었는데, 지금 읽어보면 그렇지 않으니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합니다.

 

독도 의용 수비대

 

(『사회과탐구』4-2,1996,104~105쪽)

 

6.25 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고 고향 울릉도를 찾은 국군 상이용사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다시 독도로 나서게 되었다.우리 어부들이 일본 순시선의 방해로 독도 주변의 바다에서 마음 놓고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도가 그들의 영토라는 주장에 참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상이용사들이 예비역 특무 상사 홍순칠 씨를 대장으로 하여 수비대를 결성하자, 용기 있는 몇몇 어부들도 스스로 수비 대원이 되겠다고 나섰다.이렇게 하여 조직된 수비대 대원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운 경험이 풍부하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강철 같았다. 그러나 식량도 없고 무기조차 없었다.대원들은 대구에 있는 군부대에 연락하여 대포와 총을 받아 수비대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1953년 4월 20일, 33명의 전 대원이 독도에 도착하였다. 아무 보수도 받지 않은 채 오직 우리나라, 우리 영토를 지키겠다는 마음만으로 어렵고 힘든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식량은 울릉 군청에서 대어주었고, 반찬은 주로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따서 해결하였다. 경비 근무는 두 조로 나누어 1개월씩 교대하기로 하였다.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타고 오가는 배는 작은 목선으로, 항해 도중 고장이 나기도 하고 거친 파도로 2~3일씩 표류하기가 일쑤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경비 초소는 동도에 세웠다. 동도와 서도를 오르는 데는 밧줄을 이용해야 했다. 따라서 필요한 물자까지 밧줄을 이용하여 운반하려면 모두들 손바닥이 피멍으로 물들었지만, 누구 하나 고생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원들은 일본 순시선이 나타나기만 하면 용감하게 나아가 총격전을 펄치고 물러가게 하였다.독도 의용 수비대원들의 이러한 활동은, 1956년 12월 말에 이르러 나라에서 경찰을 보내 그 임무를 이어받게 할 때까지 약 4년간 계속되었다. 대원들은 그들이 하던 임무를 경찰에 넘겨주었지만, 대원 중 일부는 평생을 독도 수비에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경찰이 되어 남기도 하였다.우리 경찰과 경비함 위의 해군 아저씨들은 40여 년 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친 몸을 추스르며 독도를 지킨 의용 수비대원들의 모습과 그 마음을 그려보며 오늘도 우리의 독도를 지키고 있다.

 

▶ 삽화 3매 : 사진

 ○ 우리나라 동쪽 끝의 섬 독도(천연색 사진)

 ○ 독도 의용 수비대(‘독도경비초사 및 표석 제막 기념 4287. 8. 28’이라고 적힌 흑백 사진)

 ○ 오늘도 독도를 지키는 우리 경찰(천연색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