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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국가교육과정위원회’의 필요성

by 답설재 2008. 6. 19.

‘국가교육과정위원회(가칭)’의 필요성에 대해 무슨 논리를 세워서 하고자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로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냥 교육과정(국가교육과정, 교육과정기준)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그것(교육과정)이 곧 교과서인양 왜곡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 교육과정에 대한 일반적 인식

 

우리나라처럼 ‘교육과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요?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 국민들은 제6차 교육과정기까지는 그런 게 있는지조차 잘 몰랐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7차 교육과정 적용기에 이르러 교육현장에서 “우리는 여건도 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수준 높은 요구를 하는 교육과정을 적용할 수 없다!”는 비판이 일고 심지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선두로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여 신문과 방송에 자꾸 보도되자 일반인들도 ‘아, 교육과정이란 게 있구나.’ ‘그 교육과정이란 게 선생님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교육과정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인식을 높이고, 교육과정을 잘 만들고 잘 적용하려면 그만큼 정성을 들이고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데는 그때 제7차 교육과정을 반대한 선생님들의 노력이 크게 기여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식이 어느 수준인지, 그렇게 인정하게 된 것에 실효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 여전히 교과서가 성전인 나라

 

우리는 아직 멀었습니다. 여전히 교육과정을 소홀하게 다루고 그 대신 교과서는 무슨 성전(聖典) 혹은 경전(經典)처럼 중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난해에 실시된 2008 수능시험 물리Ⅱ 과목에서 오답시비가 일어났을 때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는 판단의 기준을 교육과정에서 찾지 않았고(물리Ⅱ를 포함한 각 과목의 교육과정이 그만큼 허술하기도 하겠지만)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단원자분자 이상기체만을 가정한다.”면서 심지어 “수능은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본고사가 아니라 60만 가까운 학생이 보는 보편적 시험”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견해까지 내놓다가 급기야 여러 교과서에서 다원자 이상기체도 다루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결국 복수정답을 인정한 사실이 ‘교과서 지상주의’를 잘 대변하지 않았습니까?

한국의 교육과정과 교과서 연구의 메카라고 해야 할 기관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으므로 학교에서 교사들 간에 이런저런 논쟁이 일어날 경우에 누가 나서서 “봐라, 교과서에도 이렇게 나와 있지 않느냐?” 하면 그 논쟁이 일단락되는 현상은 아주 자연스럽고 어쩌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학생은 모름지기 탐구력, 사고력, 창의력, 자기주도적 학습능력 같은 힘을 길러야 21세기를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강조하다가도 돌아서면 교과서를 잘 읽고 많이 외우는 아이를 보고 ‘공부를 잘 하고 있구나’ 안심을 하게 되니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좋은 교육, 좋은 학습인지 암담할 뿐입니다. 차라리 교육학은 교육학대로 제 갈 길을 가고 교육현장에서는 언제까지나 ‘교과서가 성전인 나라’인 것이, 교육과정․교과서에 관한 한 선진국이 되기 싫고, 선진국이 될 가능성도 없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 마음이나 편할까요?

교과서가 교육의 권위를 대표하고 교육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사례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전국적으로 수많은 학교에서 수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교과서대로 가르치고 교과서대로 공부하는 획일적 현상을 두고 ‘붕어빵 교육’이란 자조적 표현으로 비아냥거리겠습니까. 앨빈 토플러가 이미 전 세기에 “오늘날의 교육은 소품종 대량생산을 하는 공장형 교육”이라고 하여 일대 풍파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현상이 고쳐지지 않고 있을까요.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교육도 당연히, 집을 지을 때 설계도가 필요한 것처럼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 계획을 우리는 ‘학교교육과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각 학교에서 만들고 있는 그 학교교육과정은 실제로는 별 구실을 하지 못하는 문서에 지나지 않아서 실제 지도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교과서대로 가르치고, 학교교육과정에 대한 평가 또한 하나마나한 형식적 평가를 하고 있으므로 학교교육은 계획과 실천, 평가가 제각각이고, 그러므로 올해의 교육성과가 내년도 계획에 피드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영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덧붙이면 교과서를 소홀히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육과정을 보다 중시하면서 ‘교과서는 기본적인 학습자료의 한 가지’라는 그 논리를 구현해보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쓰고 보니 너무 물렁해져서 좀 억울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또 덧붙입니다. 자주 인용하는 바이지만, 로저 샨크(2001)라는 인공지능학자는 “우리가 아직 교사와 교실과 교과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50년 뒤에는 거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사람들은 우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교육의 개념을 바꾸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왜 수능성적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왜 답을 암기하는 것이 지능의 증거라고 생각했는지 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교육과정을 중시하는 나라들

 

세계적으로 어떤 나라는 어떻고 또 다른 나라는 어떤지 다 찾아보려면 한이 없고, 교육과정을 어떻게 다루고 교과서 제도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평면적으로 살펴보면 재미도 없으므로 영국, 미국, 일본에 대해 각각 다른 형태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영국입니다. 영국에서는 교육과정 기준은 국가에서 결정․제시해도 교재는 자유롭게 발행하고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즉 정부에서 교육의 내용과 방법, 학생들의 성취수준을 제시하고, 교재는 정부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 그 규정 안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면 어느 것이든 자유롭게 선정․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단지 성취도평가(국가고사)를 통해서 교육의 질을 관리할 뿐이며, 교재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원리에 기초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의무교육 11년간 필요한 교재를 지방교육청의 예산으로 구매하여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와 별 상관은 없지만 우스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우리나라는 대여제(貸與制)를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엄마들(아줌마들)’이 서점에 가서 별도로 네 질을 더 구입해서 한 질은 학원용, 또 한 질은 가정용, 나머지 한 질은 가정교사용으로 쓴답니다. 물론 학교에서 배부하는 교과서는 학교에 비치해 둘 경우입니다.

다음은 미국입니다. 언젠가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The curriculum is mirror that reflects America's dreams for its next generation. It is through the school curriculum that Americans attempt to translate their values into reality. Therefore, no area of this nation's schooling has such a difficult, complicated, and dramatic history as the school curriculum.

 

-ArthurK.Ellis,JamesA.Mackey,AllenD.Glenn(1988), The School Curriculum, Massachusetts : Allyn and Bacon. P.3.

 

 

“교육과정은 미래 세대를 위한 미국의 희망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 미국인들이 우리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시도(試圖)는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미국 교육의 어떤 영역에서도 학교 교육과정처럼 어렵고, 복합적이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겠지만, 저는 교육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이 표현이 그야말로 힘차고, 아름답고, 가슴 벅차도록 웅장하고, 눈물겹도록 확신에 찬, 그리고 희망에 찬 한 편의 시(詩)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아, 진실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보다 감동적인 시가 있을 수 없다는 느낌입니다.

다음은 일본입니다. 우리나라는 교육과정심의회가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이 위원장인 ‘단선형’ 기구입니다. ‘단선형(單線型)’이라고 규정해보았는데, 그것은 그 교육과정심의회의 구조가 운영위원회 아래에 학교별위원회, 교과별위원회로 되어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즉 운영위원회가 최고기구이며 거기에서 논의되면 장관의 최종 결정만 남게 됩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심의회가 열리게 되면 차관인 위원장이 회의 주재의 실제적 권한을 학교정책실장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제는 학교정책실장이 없으므로 어떻게 진행할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육과정학회의 2006년 춘계학술대회 및 국제심포지엄 발표자료집에서 ‘일본의 국가교육과정 개정현황과 전망’(아비코 타다히코, 와세다대학교 교수)이라는 글을 보면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최고 기구로 ‘중앙교육심의회총회’가 있습니다. 28명의 위원 중 교육학자는 고등교육전문가 1명, 체육전문가 2명, 초중등교육전문가 1명이고, 그 외에는 모두 사회 각계각층의 대표자라고 합니다. 그 아래에 ‘교육과정부회’가 있습니다. 이 기구도 위원의 2/3가 산업계, 학계, 일반행정의 대표자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전문성보다는 일반성,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기 위한 심의기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그 아래에는 전문적인 교육과정 심의가 가능한 ‘교육과정기획특별부회’가 있는데, 이 기구가 우리의 ‘교육과정심의회’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교육학자가 2/3를 차지하며 그 중에는 교육과정을 연구하는 학자, 교육경영학자, 교육사회학자, 교육심리학자, 교원대표 등 폭넓은 교육학자가 포함되고 있답니다. 그러나 교육학자가 아닌 위원이 1/3이므로 그만큼 단점도 있겠지만(일본인들이 뭘 모르는 사람들일까요?) 교육학자가 대부분인 우리의 ‘교육과정심의회’보다 더 폭넓은 의견수렴이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교육과정기획특별부회’ 아래에는 우리처럼 ‘교과 등의 전문부회’가 있습니다.

 

□ 국가교육과정위원회의 필요성

 

결코 일본을 추종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부러 일본의 체제를 기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본도 우리의 좋은 점을 모방하고 있을 것입니다. 영국도 대처 수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간 다음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처럼 국가교육과정(교육과정기준)을 만들었습니다.

교과서 제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곧 국정교과서가 거의 없어지고 검정교과서가 더 늘어날 것은 당연하고, 그 다음에는 검정교과서보다는 인정교과서가 더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영국처럼 국가교육과정(교육과정기준)의 역할이 더 증대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국가교육과정이 교육내용(교과서, 수업자료 등)의 선정, 교육방법 결정, 평가기준 설정 등 모든 교육활동의 기준으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 대한 정책과 행정 일체를 지방정부로 이관하자는 의견을 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한 주(州)가 우리나라 전체보다 광활한 나라의 사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단히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렇습니다.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대한 지방정부의 역할을 확대하자면 우리나라 전체의 교육방향을 바로잡을 기구로서의 ‘국가교육과정위원회’ 같은 보다 강력한 기구가 필요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핵심적인 것(minimum essential)에 대한 훌륭한 국가정책이 있어야 이 나라가 잘 유지․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담긴 국가교육과정을 소홀히 다루고 심지어 깔보는 나라에서 무슨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논리로 국가와 국민의 수준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교육정책과 교육행정을 맡은 분들이 나서서 “우리들 중 누가 교육과정을 그렇게 소홀히 하고 깔보는지 대보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중에서 누가 교육과정을 그렇게 소중히 하고 있는지 나와 보십시오.”(비밀이지만, 그런 분이 나오면 저는 죽을 각오로-이제는 그렇게 되어도 별 회한이 없을 것입니다-한바탕 최후의 결투를 해볼 각오가 단단합니다.)

국가교육과정위원회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중 누구의 권한 아래에 두면 좋겠습니까? 국가교육과정위원회는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떤 일을 하면 되는지 구체적인 것들은 그 부분에 정통한 학자와 행정가들이 모여서 연구하면 될 것입니다. 일본을 한번 다녀와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을 잘 하면 노천온천에 다녀왔다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런 소리를 하면 싫어할 사람들도 있으므로 반론이 나올까봐 걱정이 됩니다(물론 몇 명 되지는 않겠지만).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그냥 안타까운 마음이 간절해서 써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