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부터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어느 단체에 매달 1만원씩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니네.’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어 군데 더 내게 되었습니다. 건방지게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천국은 몰라도 연옥 정도는 가겠지’ 그런 생각도 했고, ‘조금 더 생색을 내면 천국도 바라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단체에서 한 장애인의 후원자가 되어달라면서 인물사진을 보냈습니다. 말하자면 회비만 내지 말고 시간을 내어 좀 만나기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사지(四肢)가 비비 꼬인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걸 어쩌나?’ 싶었습니다. ‘안 되겠다. 도저히 못하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회비만 내겠다고 알렸습니다. ‘아, 남을 돕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구나.’ ‘연옥도 어렵겠구나.’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공개는 못하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은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어 그곳에 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필립 시먼스라는 사람은『소멸의 아름다움Learning to Fall-The Blessings of an Imperfect Life』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기 때문입니다(김석희 옮김,나무심는사람,2002, 162쪽). 잘난체하는 사람이 읽으면 가슴이 뜨끔할 이야기도 있지만 이 부분만 보십시오.
"우리는 남들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대신 형식적인 선량함을 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노숙자를 돕기 위해 쉽게 수표를 끊지만, 그들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만화 <피너츠>에서 라이너스가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나와 함께 지옥에 갈 동료들은 또 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불우한 노인들을 찾아가 보살펴주는 봉사활동은 잘 하고 있는데 자신의 시부모는 팽개쳐 두고 있어서 사람들이 욕을 해대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자랑스러워할 뿐 그렇게 욕먹고 있는 걸 모르더라고 했습니다. 흔히 그렇습니다. 칭찬받으며 남 돕는 일에는 누구나 신이 납니다. 그렇게 하고 돌아와 샤워하고 자리에 누우면 잠도 잘 오겠지만 그런 사람은 저와 함께 지옥으로 간다는 걸 아직은 모를 뿐입니다.
1학년 담임선생님들이 그러더라고, 교감선생님께서 내게 전했습니다. 학부모들이 하는 말들 때문에 너무나 힘이 들어 5월부터는 급식 자원봉사활동을 중단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담임들이 직접 밥 퍼주고 국 퍼주고 반찬 나눠주는 게 좋겠다,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보다는 그게 백 배 좋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급식 때문에 말이 생길 줄 알았습니다. 입학을 시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엄마들'은 이래도 탈이고 저래도 탈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학식 직후 이틀간 1학년 학부모들을 ‘미래관’에 모아놓고 올해는 사소한 일로 수군거리지 말고 교장에게 직접 이야기하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올해는 어떤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런 신문기사가 보였습니다(조선일보,2008.4.5.11면).「내가 급식 당번? 직장 있는 엄마는 피곤해 - 초등생 자녀 기 안 죽게 도우미 대타(代打) 이용, 요금 최고 3만원…」나는 그럴 줄 알고 당번제를 못하게 하고 자원봉사 할 분을 모집하게 했습니다. 선뜻 지원해주신 분이 많은 걸 다행으로 여겼지만, 여러분께 감사도 드리지 못한 채 차일피일하다보니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자원봉사를 맡으신 여러분은 아직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정작 교장인 내 마음 곁에서 나와 함께 그분들을 지켜보며 고마워해야 할 다른 학부모들이 듣기에 난처한 말들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 아이 밥이 너무 많다." "적다." "내 아이는 그 반찬 잘 안 먹는다." "맛있는 반찬인데 왜 조금만 주나." ……. 그만 하겠습니다. 더 전하면 뭐 하겠습니까.
그런 학부모들은 자녀를 왜 학교에 보내고 있을까요? 그렇게 걱정되면 차라리 집에서 가르치고 집에서 점심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혹 학교와 가정도 구분 못하고,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들려는 건 아닐까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대하는 것이 가정에서 한두 명의 자녀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기를 기대한다면 무엇을 배우게 하겠다고 학교에 보내는 것일까요? 그렇게 잘 할 수 있다면 왜 자원봉사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교장이 형편없어서 그 역할을 대신하여 직접 감독을 하겠다는 건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면, 자신은 그런 일을 잘 할 수가 없지만, 혹은 자신은 고급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기가 싫지만, 남이 하는 일에 대한 비판이나 평가는 전문적으로 잘 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런 학부모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이것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심하군요. 부모의 자격을 생각해보셨습니까? 학교에 찾아와서까지 자식교육 망치지 마십시오. 망치려거든 부디 가정에서나 그렇게 하시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학교에 맡기세요. 교육은 가정에서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가정과 학교가 같다면 학교가 왜 있어야 합니까! 정신 좀 차리십시오. 내가 입학식 때 부탁한 걸 벌써 잊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1학년이 되었듯이 여러분도 겨우 1학년 학부모입니다. 뭘 좀 알고 싶으면 1학년 학부모들끼리 속삭이지 마시고 교장에게 묻거나 고학년 선배 학부모들로부터 '우리 아이도 그렇게 하면서 자랐다'는 이야기 좀 들어보십시오. 그 아이들도 그 부모들에게는 다 소중한 아이들이니까요. 그렇게는 못하겠다면 집에서나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세요."
내 마음이 이런데, 자원봉사를 잘 해주시는 학부모님 여러분이나 담임선생님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 데리고 직접 밥 퍼 주고 국 퍼 주고 반찬 나눠 주시게 되면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크고 많겠습니까?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담임선생님들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합니다. '고 나비 같은 것들'이, '고 꽃잎 같은 것들'이 학교 와서 몇 시간 보내고 식판을 들고 들어가 오물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예쁩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고것들과 함께 교육적인 시간을 보내실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부끄럽지만 내 여식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그 애의 아이, 그러니까 내 외손도 올해 1학년입니다. 어느 날 급식당번이 되었는데 함께 간 학부모가 그 놈에게 밥을 너무 많이 주더랍니다. 내 여식이 얼른 한 마디 하려다가 '이게 바로 간섭이겠구나. 매일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하고 참았답니다. 내가 모처럼 여식을 칭찬했습니다. "네가 난생 처음 교육적인 판단을 했구나."
내 마음 곁에서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학부모들이 내게 맞서겠다고 나서는 꼴이니 교육이란 제대로 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서 허탈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시 부탁해보겠습니다. 이 편지 보시고 "이건 누구 엄마 이야기다!" 그러시면 또 다른 말이 생깁니다. 그러지 마시고 지금부터라도 부디 교장 좀 도와주십시오. 그 도움은 결국 그 '끔찍한' 자녀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교장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가 자식에게 생선가시 발라주듯 날짐승도 새끼는 귀여워합니다. 그러나 그 날짐승이 새끼 키워 독립시킬 때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어느 날 자립심 없는 한심한 그 자식 쳐다보며 서럽게 눈물 흘려야 하는, 스스로 자식을 망친 '초라하고 불쌍한 어미'가 되어야 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도저히 못 참겠으면 전화를 해주시고, 누군가 밝히고 싶지 않으면 이메일로 알려주십시오. 나는 좀 분주해서 누가 보냈는지 알아볼 여유도 없고 그렇게 유치하지도 않습니다.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2008년 4월 21일
교장 ○○○ 올림.
이 편지는 4월 21일(월요일)에 보내려고 했으나, 그날 우리 학교 1학년 아이들이 처음으로 대망의 현장체험학습(능동어린이공원)을 가게 되었으므로 4월 19일(토요일)에 발송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이 재미있게, 안전하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일부 학부모의 간섭에 휘둘리지 말고 잘 다녀오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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