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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무서운 곳, 학교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무서운 곳, 학교

- 우리 교사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하고싶은 분들께 -

 

 

 

세상에 부끄러운 일 없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시고 가족을 보살피며 조그만 범법 행위조차 저지를 줄 모르고 착하게만 살아가시는 여러분은, 경찰서 앞을 지날 때,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그냥 동사무소나 우체국 앞을 지날 때와 같습니까? 거울처럼 말짱한데도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나,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의식이 아닐까요? 학교에 오시면 어떻습니까? 따뜻하고 정겹고 아늑합니까? 아니면, 때로는 왠지 호통을 치거나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놓고 돌아가야겠다 싶습니까?

 

학교는 가정과 많이 다릅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는 난생 처음 대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즘은 한 가정에 아이들이 한둘밖에 없지만 학교에 오면 수십 명, 수백 명이 함께 생활하지 않습니까? 이곳은 아이들에게 인간관계란 그리 만만치는 않고 자기 뜻대로만 되지는 않으며 살아가는 데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가르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아이들이 그렇게 배운 것들을 집에서는 제대로 실천하며 생활합니까? 가령,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리게 하십니까? 까짓 것, 이른바 '건강하게만' 자라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지금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습니까? 배를 깔고 엎드리거나 어디에 기대어 텔레비전이나 책을 보다가도 어른이 지나가면, 몇 번이라도 똑바로 일어나 앉습니까? 아직은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까? 그러면, 언제쯤 가르치실 예정입니까?

 

아, 내 아이가 어떻게 저런가, 싶으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습니다. 교육계에서 명망 높은 제 선배 한 분이 호텔에서 무슨 기념회를 하는데, 삼십대 중반의 그 아드님이 큰소리로 "아빠!"하고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 동료 한 분이 대뜸 "야, 이 사람아! 아빠가 뭐야, 아빠가." 했습니다. "나는 '아빠'라는 호칭이 듣기에 순하고 정겨워 좋기만 하다"고 할 분도 계시겠지요. 우리는 그런 생각에 대하여 '매우 주관적'이라고 합니다. "명망 높은 교육자도 그러므로 정말 어려워" 하신다면 - 교육은 이처럼 오묘한 것이어서 한번 해볼만한 것이기도 하지만 - , 그걸 고칠 사람은, 아니꼬울지 몰라도, 바로 교사입니다.

 

학교는 이러한 면들을 고루 가르치는 곳입니다. 여러 명을 가르치는데도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능률적이고 빠르기도 합니다. 학교가 아이들의 머리 속에 교과서에 적힌 지식이나 넣어주는 곳이라면 아예 홈스쿨링을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성복 아이들은 대부분 홈스쿨링이 더 빠를 아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이 눈부신 아이들'을 우리 학교에 보내시는 이유를 여러분은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렇게 가르쳐 놓은 것을, 스스로, 그것도 학교에까지 오셔서 '와장창' 깨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우리 교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실 때, 만약 우리 교사들이 '그래, 내버려두자' 한다면 그 아이는 재빨리 부모의 의향을 파악하고 얼른 도피의 골짜기로 몸을 던집니다. 그러므로 학교는 이렇게 보여도 사실은 무서운 곳입니다. 저로서도 때로는 '그래, 참자' 극기훈련이나 하고싶기도 합니다. 신분과시라면 그냥 선망이나 하며 자신을 낮추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 예를 들고싶은 것이 여러 가지이지만 - "나도 큰소리를 낼 수 있다"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과시를 하시면, 무슨 상처가 그리 깊어 저렇게 되었을까,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 분에게는 부디 그런 의식을 아름다운 그 자녀에게는 물려주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녀의 정체성은, 그 자녀의 존귀함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높은 교양임을 명심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요즘같이 분주하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사실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도대체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개탄慨歎·慨嘆을 하기도 하지만, 학교인들 이처럼 자유분방한 아이들을 하나하나 가르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서로 협력하여 가르쳐도 어려운 일을 부모가 나서서 방해한다면 우린들 무슨 수로 힘을 내어 가르치겠습니까?

 

영국 국왕 촬스 Ⅱ세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웨스트민스턴 학교 교장 리처드 버스비와 함께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답니다. 버스비는 왕의 앞에서 모자를 쓴 채 당당하게 걸었고, 왕은 모자를 팔에 낀 채 그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교문 앞에 선 버스비가 비로소 고개를 숙였습니다. "전하,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저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저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존경을 받고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존경을 받을 만한 인격을 갖추지도 못했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이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아이들을 대충 가르칠 수는 없으며, 마음을 다해 가르쳐야 한다는 것까지 양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언제까지라도 여러분의 자녀를 보호해주며 갈 수는 없으므로 교육을 통하여 높은 교양과 빛나는 지성을 갖춘 유능한 엘리트, 마음과 정신의 귀족을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6년 6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