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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우리 학교 시험문제가 쉽다는 비판에 대하여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초등학교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우리 학교 시험문제가 쉽다는 비판에 대하여

 

 

 

11월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으므로 학부모님들께서는 아이들보다 먼저 올해의 마지막 학업성취도평가를 걱정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난 가을에 실시한 학업성취도평가 후에는 제가 당혹감을 느낀 일이 있습니다. 어떤 학부모님께서는 "우리 학교 시험문제가 너무 쉽다"고 하신다는 이야기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매번 전학년 시험문제를 미리 모두 풀어보고 선생님들께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는 왜 이렇게 까다롭게 냈습니까? 더 쉽게 내실 수 없을까요?" 그런데 학부모님들께서는 저와 반대되는 말씀을 하신다고 하니까 제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무얼 기준으로 "쉽다, 어렵다" 하시는 걸까요.

 

우선, '평가를 어떤 목적으로 하는지' 좀 따져봐야겠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지만 교육을 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선발적 교육관'은 아무리 잘 가르쳐도 우수한 수준에 도달하는 학생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교육관을 가지면 주로 '상대평가'를 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발달적 교육관'은, 어떤 학생이라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모두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가정·신념으로, 이러한 교육관을 가지면 주로 '절대평가'를 하게 됩니다. 발달적 교육관을 이야기한 브루너(Bruner, 1960)라는 학자는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만약 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가르치면 어른들보다 더 빨리 학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임인제, 1976, 『절대기준평가의 원리와 실제』, 배영사, 11쪽). 또, 캐롤(Carroll, 1963)은 '얼마나 잘 학습했느냐'에 대하여 '그 학습과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비해 얼마의 시간을 투입했느냐'의 정도로 나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위의 책, 14쪽). 그는 심지어 지능(IQ)에 대해서도 어떤 학습과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를 나타내는 숫자일 뿐이라고 했으므로, 아마도 발달적 교육관을 선호한 학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을 것입니다.

 

좀 어렵고 딱딱한 이야기입니까? 제가 봐도 진도가 좀 나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쉬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상대평가를 하게 되면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수(秀)를 받을 아이는 이미 딱 5%로 정해져 있다. 말하자면 그 5%를 빼고는 죽도록 공부해봤자 다 헛일이다."

 

아마 여러분께서 초등학교를 다니신 시절에는 이러한 상대평가제도가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발달적 교육관이 우세하여 초등학교에서는 학업성취도평가를 절대평가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부모님들은 옛날의 초등학교 시절을 염두에 두시고 '요즘은 뭐 이런가' 싶을 때가 많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절대평가를 적용하면,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게 됩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노력하기만 하면 모두들 내가 가르치는 것들을 다 잘 알게 되고, 그러면 모두들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절대평가란 운전면허시험처럼 잘만 하면 모두들 성공할 수 있는 평가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여러분은 어떤 선생님께 자녀를 맡기고 싶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헛일이라는 선발적 교육관에 따라 상대평가를 하는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모두들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발달적 교육관에 따라 절대평가를 하는 선생님입니까?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상대평가를 하게 되면 가령 50점을 받고도 1등만 하면 수(秀)를 받을 수 있으므로 우선 친구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절대평가를 하게 되면 다른 아이들이 어떤 성적을 거두는가는 문제가 아니고, 내가 잘하면 그만이므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덧붙여 설명하고 싶은 것은, '그럼, 학교에서는 언제나 절대평가만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학에서는 일정한 인원만 입학을 허가하므로 상대평가로 신입생을 뽑게 되며, 우리 학교에서도 무슨 대회를 할 때는 딱 한 명의 '대상(大賞)'을 뽑기도 하고, 절대평가를 하여 잘한 아이가 많으면 많은 수의 입상자를 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절대평가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우리 아이들이 즐겁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제도를 마련해주는 것이 경쟁을 일삼기보다는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왜 우리 학교 선생님들께 가능하면 쉽게 출제하도록 부탁드리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다 같은 시험문제를 일부러 어렵게, 혹은 희한하게 출제하여 알고 있는데도 틀리게 되면 그 아이는 얼마나 억울하고 섭섭하겠습니까? 저는 바로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학부모님들은 무턱대고 "어려울수록 좋다", 혹은 "지금의 시험문제는 너무 쉽다"고 하신다면 비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물론 저는 각 교과마다 깊이 생각해야 풀 수 있는, 말하자면 도전의식을 느낄만한 문제가 한두 문제는 있으면 좋겠다는 부탁도 하고 있습니다. '까짓 것 열심히 할 것까지는 없다'는 자만심을 길러서는 안 되니까요.

 

자, 그러면, 12월초에 실시될 학업성취도평가를 기다려봅시다. 이제 학부모님께서는 "네가 ○○이보다 잘했니?"가 아니라, "우리 아이가 목표를 잘 달성했구나."라는 말씀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005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