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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어머님의 그 따님은 도대체 무얼 그리 잘못했습니까?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초등학교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어머님의 그 따님은 도대체 무얼 그리 잘못했습니까?

 

 

 

 

그때가 아마 초가을이었지요? 그때 그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제와서 그 일을 따지고 싶어 하는 제가 좀 비굴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저는 그동안 그 일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께서는 그 예쁜 따님을 막무가내로 꾸중하고 있었습니다. 따님은 줄곧 아무말도 못하고 어머니의 짜증 섞인 고함을 맨몸으로 소나기 맞듯 듣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듣기만 한 건 아니었군요. 교실에서 방금 내려온 듯 신발주머니에 실내화를 넣고 신발을 갈아신고 있었습니다.

마침 저는 후관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기가 정말 난처하여 못 본 척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혹 제 모습을 보셨는지요?

 

저는 지금까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학교의 책임자는 교장인 저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 건물 안에서 제게 맡겨진 아이를 그렇게 무참하게 꾸중하실 수 있습니까?

"내 자식 내가 꾸중하는데, 당신이 웬 참견이냐?"고 하시면 현실적으로는 제가 밀리겠지요. 그러나 그 장면에서 저는 얼마나 비참하고, 제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따님은 또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비참했겠습니까?

사실은 저의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이 학교는 국가가 저에게 맡긴 학교가 아닙니까? 이 울타리 안에서는, 제가 일상적으로 지도하라고 담임들에게 맡긴 일을 제외하면, 심지어 범죄자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저에게 이야기하고 처리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학부모님들께서 보시기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물씬 풍기는 이 학교의 모습이 동네나 거리보다 아름답고 아늑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장인 저의 허락 없이는 아이들에게 손을 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어떤 아이도 꾸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은 아름답고 아늑한 그만큼 무서운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저의 권한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이 모양으로 가르치느냐?'는 듯이 이 건물 안에서 그렇게 꾸중하심으로써 제 자존심과 체면도 송두리째 팽개치시고 '이것이 과연 내가 책임지는 학교인가!' '나는 얼마나 무능한 사람이 되었는가!' 저로 하여금 한없는 비참함을 느끼게 하신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까지 지울 수 없는 생각은, 그 따님이 지나가는 저를 비껴보며 얼마나 가슴아파 했을까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가엽다는 것입니다. 그 어린것이 담임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보아도 부끄러웠을 텐데, 그것도 교장이 보았으니 도대체 그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그 어린것이 그 날 그 기억을 언제까지 갖고 가다 어디서 버리겠습니까?

 

잘못한 아이는 당연히 호된 꾸중을 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당장 그 부모를 찾아보고 '저 모양으로 생겨먹었으니 아이도 저 모양이지!' 생각하게 되고, 그런 사람과는 한시도 한자리에 앉기가 싫을 정도로 혐오감을 느낍니다.

우리나라에는 요즘 그런 어른들이 아주 많아서 그처럼 자식을 망나니로 키우면 언젠가 부모가 먼저 눈물 흘릴 날이 온다는 저주를 하기도 합니다. 집에서 그 모양으로 키우니까 밖에 나와서도 표를 내는 것입니다. 아니, 집에서 자식에게 잘 대해주지 못하는 그 죄값을 과보호로 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날 그 시간, 그 어린것이 도대체 무얼 그리 잘못했는가는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잘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어른들처럼 그런 잘못을 저지르기야 했겠습니까! 그런 잘못 따위를 제가 왜 궁금해해야 합니까! 다만, 무엇이 그리 급해서 교장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막무가내로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셔야 했는가가 궁금할 뿐입니다.

댁에 돌아가셔서 차근차근 꾸중하실 수는 없으셨는지요.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 곳에서 혹독하게 꾸중하실 수는 없으셨는지요. 부모에게 자존심과 체면이 있듯이 아이에게도 자존심과 체면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실 수는 없었는지요.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없이 그렇게 하시면 깊디깊은 상처가 된다는 경험을 하신 적은 없었는지요.

성격이 급하셔서 그랬습니까? 저도 성격이 참 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어렸을 때 아비로서 잘못한 일도 참 많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연령으로 보면 제 후배가 될 테니 선배가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들으실 만은 하시겠지요. 성격이 급하거나 느리면 평생 수양하기에도 좋습니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책 이름만 많이 외운 저 파스칼의 『팡세』(536장)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은 「너는 바보다」라고 자주 말하면 실제로 그런 줄 알게 되고, 또 자신이 바보라는 말을 자주 들으면 그는 정말로 그런 줄 믿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조절해야 한다. ……."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은 누가 바보입니까? 아니, 기본적인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아이와 어른 중에서 누가 더 선합니까? 제가 보기에 따님은 착합니다. 누가 보든 말든, 선생님께서 시키신 대로 현관까지 내려와서 신발을 갈아신는 그 모습만 봐도 저는 짐작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의 760여 명 아이들이 한 명도 밉지 않습니다. 밉다니요, 모두들 아름답고 귀엽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답고 귀여운 이 아이들의 자존심과 체면도 좀 세워주십시오.

더불어, 교장인 제 자존심과 체면도 좀 세워주십시오. 제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시면 제가 얼마나 비참하겠는지 짐작이나 좀 해주십시오. 교장은 어디 허수아비인줄 아십니까.

 

 

 

2005년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