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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하여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하여

 

 

 

 교사들과 아이들이 다 돌아간 저녁, 운동장 놀이 기구 주변에서 서너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 한 여자아이가 제 동생인 듯한 남자아이 곁에서 - 얼핏 보면 둘 다 같은 나이일 것 같은데도 - 연방 "조심해, 조심해." 걱정하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아니라면, 어디 온천에 가셨을 때 이런 모습은 보셨습니까? 형인 듯한 아이가 온탕의 둘레에 걸터앉은 제 동생의 손을 붙잡고 "들어와 봐. 괜찮아. 봐, 괜찮잖아. 자, 어서 들어와 봐."

 

그 운동장 가의 누나나, 온천의 형인 듯한 아이나 제 집에서는 동생이고 뭐고 곁에 오는 것조차 귀찮아할 때가 흔하며,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다투기도 한답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그렇게 하며 사회 생활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 다투면 서로가 불편하게 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며, 세상은 어차피 남들과 어우러져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각 가정이 핵가족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며 그것도 자녀가 한 명뿐인 경우가 흔하여 드디어 '아이 많이 낳기'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니 우리 교육자들이 볼 때는 '이제 형제우애에 대한 교육을 하기는 쉽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더불어, 한 아이만 키우고 있는 가정에서는 - 대체로 잘 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 그런 면의 자녀 교육이 힘들겠구나 싶을 때가 있고, 다른 아이들과 다툼이 생기면 혹 남을 배려해야 하는 마음이 미흡한 것이나 아닌지 걱정을 해보기도 합니다.

 

어른들끼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학교 학부모님들끼리는 어떻습니까?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잘 나누시고 정을 나누며 지내시는 편입니까? 그렇다고 온 아파트 주민들을 흡사 시골에서처럼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좀 별스럽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요즘은 이웃끼리도 서먹서먹한 게 사실이 아닙니까?

 

이러한 현상을 산업 사회의 영향이니 뭐니 하고 분석할 만한 여유는 없으나, 제가 지적해 본 사항들이 어느 정도는 공통된 경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어떤 학교에서는 의남매, 의형제, 의자매 맺기를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보면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우리 학교 같으면 충분히 그 사례를 도입할 만한 여건이 된다고도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만약 1학년과 4학년이 의형제가 된다면 좀 우스운 예가 되겠지만, 얼른 달려가서 "형, 이가 날 때렸어." 하거나, "누나, 나 좀 빌려 줘." 하며 지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 형이나 누나, 오빠는 동생을 배려해보는 기회를 누리게 되겠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2학년, 5학년이 되고 다시 3학년, 6학년이 되면 이별을 하게 되고 그 이별의 정도 나누게 되겠지요. 아, 생일 파티도 그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함께 하면 더 좋겠군요. 또 있습니다. 아이들끼리 친해지면 어머니들끼리도 친해져서 함께 시장에 가실 수도 있겠고, 그러다가 발전하면 어느 주말은 함께 보내고 혹 휴가를 같이 가시는 경우도 생기겠지요.

 

우리는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정(情)이란 나무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무 깊이 있게 지내다보면 본의 아니게 한쪽이 다른 쪽을 오해하실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맺어준 인연이므로 아무래도 서운하거나 이상하다 싶을 때는 선생님과 면담하여 그 오해를 풀거나 다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으므로 그런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디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 같은 아이,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같은 아이를 상상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관계를 맺게 될 아이를 만나보고 틀림없이 실망부터 하게 될 테니까요.

 

나이 서른 다섯에 루게릭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 영문학 교수 필립 시먼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대신 형식적인 선량함을 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노숙자를 돕기 위해 쉽게 수표를 끊지만, 그들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 힘들다. 만화 <피너츠>에서 라이너스가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소멸의 아름다움 Learning to fall』, 김석희 역, 나무심는사람, 2002, 162쪽).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차라리 헤어져버렸으면 좋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함께 지내고, 친해지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활동을 전 학생을 대상으로 전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미 형제, 자매, 남매가 있는 가정도 많고, 굳이 그렇게 할 의향이 없는 부모님이나 학생도 많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희망부터 받아보고 조건(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이 맞는 경우가 있으면 소규모로 시작해보고, 긍정적이라고 판단되면 확대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통하여 우리 어린이들과 학부모님들이 보다 정겹고 따뜻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5년 11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