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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1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시거든 조금만 보여주세요

by 답설재 2007. 8. 29.

학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시거든 조금만 보여주세요

 

 

 

어제 용산의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을 열었답니다. 신문을 보았더니 "9만3천 평 부지에 연면적 4만6백 평, 건물 전체 길이 404m! 연면적으로 치면 세계 6대 박물관 규모이며, 단일 건물로 이뤄진 전시장은……."(조선일보, 2005. 10. 24) 등등 자못 감격적인 문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다른 면을 보았더니 이 박물관을 제대로 다 보려면 11시간이 걸리며, 박물관에 다녀왔다는 생색을 낼 사람을 위한 40분 짜리 코스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안에 있을 때 점심을 얼른 먹고 잠깐씩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한 전시실에만 들어가 오늘은 이 유물, 내일은 저 전시물을 택하여 '저것이 왜 국보일까?' 혹은 '어느 것의 값이 더 많이 나갈까?' '나보고 한 작품만 가져가라고 하면 어느 것을 택할까?' 별 생각을 다하며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서고는 했습니다.

동료들은 '이상하게 감상한다'고들 했지만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그런 식으로 감상하는 것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참 듣기 싫은 소리, 보기 싫은 꼴이, 어느 곳에 가든 우루루 몰려온 사람들이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곧 사진 한 판을 찍고는 또 우루루 몰려가는 모습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어른들이 그 모양이라면 견학이 제대로 될 리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는 일이 교육이니까 교육에 관한 참 좋은 책 한 권을 내는 것이 소원인 저로서는 다른 사람의 책을 소개하는 것이 늘 속상하고 배아픈 일이나 할 수 없이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인터넷이나 문화재 도록에서 '청자 모자 원숭이 연적'을 한번 찾아보시면 더 좋겠습니다. 찾아보지 않아도 생각나는 분도 계시겠지요.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윤용이, 학고제, 1996)라는 책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청자 중의 하나로 '모자(母子)원숭이'라고 불리어지는 연적입니다. 대체로 12세기 후반에 널리 만들어진 것입니다. …(중략)… 어미 원숭이가 아기 원숭이를 안았는데 아기 원숭이가 싫다고 가슴과 뺨을 미는 모양입니다. 윗부분에 구멍이 뚫린 연적이고 크기는 10cm 정도로 아주 작습니다. 비례에 있어서 적정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누구나 가지고 싶어할 유형들이 고려청자의 전성기에 만들어지는데 아마도 고려 귀족들의 높은 문화적 역량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자 원숭이 연적은 독창적이며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간송미술관에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얼마나 신기해할까요?

 

이 작품을 감동적으로 소개한 글도 있습니다. 『나는 공부하러 박물관 간다』(이원복, 효형출판, 1997)는 책으로, 이 작품을 세 페이지에 걸쳐 소개하고 있는데 조금만 보겠습니다.

 

"새끼를 품에 안은 어미 원숭이의 눈길은 몹시도 따사롭다. 한 손으로 새끼의 엉덩이를 가볍게 어루만져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등을 도닥거리고 있다. …(중략)… 사랑이 깃든 동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 사랑이 깃든 손길은 매라 할지라도 잘못을 정화시키고 바름을 일깨운다. '어머니의 손길은 약손이다'라는 구절도 사랑의 손길이기에 타당성을 얻는다. 이 아름다운 연적을 손에 쥐고 사용했던 우리 선조들 모두는 애정의 손길을 지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고, 이 연적에 담긴 물로 갈아진 먹은 하나같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름답고 따뜻한 글과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글에 대하여 무얼 더 이야기하겠습니까?

 

하필 간송미술관의 작품 하나를 소개했지만, 우리의 자랑스런 국립중앙박물관은 15만 점 이상의 소장 유물 중 1만1천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다고 하니 이와 같은 눈길로 감상해볼 만한 작품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11시간 가지고 무얼 감상하겠습니까? 좋은 일인지, 부끄러운 일인지, 혹은 또 어떤 일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박물관에는 남의 문화재를 빼앗아와 전시하는 경우는 없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반면 그 얼마나 값진 우리 문화재가 다른 나라로 흘러나가 있겠습니까?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 선생의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제, 1994)라는 책에서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러한 종류의 진사 청자기 중에 가장 뛰어난 예는 미국 워싱턴 시 프리어 미술관에 있는 청자진사채연화문주전자이다. 큰 연꽃 봉오리 위에 작은 연꽃 봉오리가 포개진 조롱박 모양의 주전자로 그 잘록한 병목에는 앞뒤에 동자상이 하나씩 기대어 서 있고 연잎 고갱이로 형상된 손잡이 위에는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으며 연잎 새순처럼 늣늣이 뻗어난 귓대부리의 길고 연약한 곡선은 둥근 몸체의 형상에 너무나 어울리는 고려적인 곡선미의 멋을 보여준다. …(후략)…"

 

제가 더 설명할 만한 것은 없지만, 이것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이러한 작품들의 각 부분은 무슨 비밀처럼, 자세히 보지 않는 사람, 무성의한 사람, 사진 찍기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값어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동자상이고 원숭이고 청개구리고 간에 그런 분이 앞에 오면 얼른 몸을 숨겨서 보이지 않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이 보여주시고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 '많이'가 '대충대충'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식시켜 주십시오. 우리의 그 박물관은 여러 번 가는 곳이지 한번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하여주십시오.

주말에 어디 가십니까? 항상 안전에 유념하시고 즐겁게 지내시기 온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2005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