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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인사6

백석 「흰밤」 백석 / 흰밤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 그야말로 가을밤, 추석입니다. 온갖 것 괜찮고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듯 오늘도 낮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블로그 운용 체제가 티스토리로 바뀌자 16년째 쌓이던 댓글 답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바람에 그렇게 되었는지 오가며 댓글 답글 다는 일에 시들해졌는데, 그러자 시간이 넉넉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없는 날에도 그 댓글 답글이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때로는 한 편의 글을 쓰기보다 정성을 들여서 댓글을 달고 답글을 썼습니다. 또 힘을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 2022. 9. 9.
"안녕!" "응, 오케이~" 저 녀석은 올봄에 1학년이 되었습니다. 저 아래 동네에서 혼자 등교합니다. "안녕!" "안녕!" 사뭇 간단한 인사를 나누다가 한 마디 보태보았습니다. "잘 다녀와!" 뭐라고 웅얼거리는데 그 대답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에는 인사를 바꿔보았습니다. "조심히 다녀와!" "응! 오케이~" '응'이라고? 그 참... 이상하다... 내 인상이 고약할 텐데 감히 '응'이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안녕!" "응, 안녕!" "조심해!" "오케이~" 저 아이와 나 사이에는 구체적인 계약 같은 것이 없어서 서로 간에 의무나 권한 따위도 없습니다. 관계래야 혹 만나게 될 때 내가 녀석을 괴롭히지만 않으면 되는 것인데 인사하는 게 괴롭히는 일일 수도 있을지 몇 번 생각해봤고 저만큼 걸어가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몇 .. 2021. 5. 19.
"나는 이미 유령입니다" # 1 지금은 아파트 앞 미장원(헤어샵?)을 기웃거리다가 손님이 없구나 싶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슬쩍 들어가지만 전에는 굳이 이발소(말하자면 남성용 '헤어샵')를 찾았고 그것도 현직에 있을 때처럼 꼭 주말을 이용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리 없어서 연중 '주말'인데도 그딴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 굳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차를 가지고 멀리 이웃 동네에 있는 이발소를 찾아가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퇴임한 지 네댓 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아침나절이었습니다. 이미 두어 명이 소파에서 주말판 신문을 보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 머리를 깎고 있는 중년은 분명 K 교사였습니다. 들어서면서 거울 속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하마터면 인사를 할 뻔했습니다. 하마터면? 그 순간! .. 2021. 5. 14.
안녕? · 뭘해? · 사랑해! 사람들이 AI(인공지능)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랑해!" "안녕~" "뭘 해?"랍니다. 2주 전인가, 주말 오후 교외에서 들어오는 자동차 안에서 'FM 풍류마을'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오프닝멘트로 소개되는 걸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외로움을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소개된 순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랑해!" "안녕~" "뭘 해?" 그건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들을 스스로 로봇에게 해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로봇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많겠지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인사를 건넬 수도 있겠지요. "파란편지, 사랑해!" "안녕~ 파란편지."(혹은 "안녕? 파란편지") "파란편지, 지금 뭘 해?" 지금까진 아무리 외로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2021. 3. 19.
감사해하는 줄도 모른 채 헬스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빈둥빈둥 놀면서 먹기만 하니까 체중이 늘고, 그런데도 또 먹고 마시고 놀면서 헬스장에는 왜 다니냐는 것입니다. 등산도 하고 테니스, 골프를 하지 왜 헬스냐고 다그치면 그런 분 바라보기에는 눈이 부셨습니다. 주말이면 주차장은 물론 아파트 앞길이 일렬 주차로 미어터지는 유명한 뒷산을 두고도 헬스장 회원권을 사서 그조차 일주일에 잘해야 서너 번 다닙니다. 이번 달에는 몸살이 나서 보름 동안 아예 헬스장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가봤자 뾰족한 수도 없습니다. '노인이 미쳤나!' 할 것 같아서 빈 자리를 찾아 대충 이십 분쯤 팔다리를 흔들다가 얼른 샤워장으로 갑니다. 운동을 왜 그렇게 하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 체육회에서 시니어 선수로 나오라고 할까봐서.. 2019. 4. 22.
「인사」 인 사 고수영 길 가다 만난 친구에게 달리는 버스에게 종종 빨간 발목 비둘기에게 꼬리 살랑살랑 강아지에게 한들한들 꽃에게 먼지투성이 비닐봉지에게 가만 놓아두어도 흔들리는 그네에게 기어가는 개미에게 물을 풍풍 뿜어내는 분수에게 세 살 동생은 모두에게 "안녕, 안녕, 안녕!" ♣ .. 2012.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