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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오탁번5

「聖誕祭」 聖 誕 祭 金 宗 吉 어두운 방 안엔 발갛게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스런1 옷자락에 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聖誕祭의 밤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 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2 찾아볼 길 없는 聖誕祭 가까운 거리에는 이제 소리없이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血液 .. 2017. 6. 22.
기승전결(起承轉結) 기(起) 승(承) 전(轉) 결(結) '나도 저렇게 해서 오늘 여기에 이르렀다면……' 소용도 없고 무책임한 생각을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일을 저렇게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끌고 왔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약속한 건 단 한 가지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더러 오탁번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핑계를 대고 위안을 삼고자 한 것입니다. 구름을 비껴 날으는 기러기 같은 당신을 밤나무나 느티나무 가지 위에 얼기설기 지어놓은 까마귀 둥지로 손짓해 불렀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괴롭습니다 어둠의 문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서 우리가 꿈꾸어온 시간은 나뭇가지 끝 겨우살이처럼 덧없는 목숨은 아니었습니다 여름날 장독대 위에 내리는 여우비처럼 울 수만은 없어서 이렇게 높은 하는 쳐다보고 또 쳐다봅.. 2015. 9. 7.
「겨울잠」「문득」「고향 외갓집 밤나무 숲」 「겨울잠」 「문득」 「고향 외갓집 밤나무 숲」 『現代文學』 2014년 1월호에서 세 분의 늙은 시인이 쓴 시를 모았습니다. 세 노인의 편안한 시를 다시, 또 다시 읽고 싶어서였습니다. 편안한 것이 이렇게 좋구나 싶어서였습니다. 나도 이렇게 편안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욕심이라면, 그.. 2014. 3. 23.
오탁번 「작은어머니」 작은어머니 푸새한 무명 뙤약볕에 말려서 푸푸푸 물 뿜는 작은어머니의 이마 위로 고운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보리저녁이 되면 어미젖 보채는 하릅송아지처럼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안질이 나서 눈곱이 심할 때 작은어머니가 솨솨솨 요강 소리 그냥 묻은 당신의 오줌을 발라주면 내 눈은 이내 또록또록해졌다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 작은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잤다 회임 한 번 못한 채 젊어 홀로 된 작은어머니의 예쁜 젖가슴은 가위눌림에 정말 잘 듣는 싹싹한 약이 되었다 오탁번 『눈 내리는 마을』(시인생각, 2013), 22쪽 오탁번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시인의 시에는 스토리텔링이 들어 있어서 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읽기가 어려운 시도 많습니다. 재미가 없더라도 '시인이 애써서 지은 시니까……'.. 2013. 4. 27.
오탁번 「라라에 관하여」 라라에 관하여 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稚岳山을 한참 바라다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天井에서 겨울바람이 달려가고 대한극장 이층 나列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 날, 서울역에 나가 나의 내부를 달려가는 겨울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高麗歌謠語釋硏究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소리에서 깨어난 아침, 次女를 낳았다는 누님의 해산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것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본능의 바람이여, 아름다움이여. - 『현대문학』 2012년 2월호(212~213) 김행숙 시인의 「누군가의 시 한 편」 - 출전 : 오탁번 『아침의 豫言』(조광출판사, 1973). 오탁번 시인은 재미있습니다. .. 2013.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