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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연서6

안현미 「와유(臥遊)」 와유(臥遊) /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2012년 11월 2일, 비감어린 그 저녁에 이 시를 옮겨적었는데 나는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정말 한지에 연서를 쓸 수 있겠는가 싶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바스라지는 것일까요? 그날 장석남 시인이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시」에 소개했습니다. 2022. 10. 11.
그대와 나 ⑷ 그대와 나 ⑷ 그대는 주민센터나 체육문화센터, 복지센터의 1만 원 이하의 프로그램을 찾아다닌다. 그게 좋아서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최근에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구차하게 사느냐고 다그치며 지냈지만 끝내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모르고 있다. 2018.2.3. 2018. 3. 18.
그대와 나 ⑶ 나에게 평생 쩔쩔맨 그대는, 내가 사람들 때문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날 "드디어 사람이 좋다"고 했다. 2017. 4. 4.
그대와 나 ⑵ 그대와 나 ⑵ 나는 실바람만 불어도 꺼지고 말 가녀린 촛불 같은, 소홀하게 만지면 바스러져 버릴 존재이고, 그대는 당연히 철판 같은 것으로 조립된 인조인간쯤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여긴 세월이 너무 오래여서 나는 그대의 생각 같은 건 물을 수도 없게 되었다. 2017.2.23. 2017. 3. 30.
그대와 나 그대와 나 그 손이 차가울 때 나는 본래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 지냈는데 뜨거워져 있다. 오십 년이 되어가니 이걸 안 것은 너무도 오랜만이다. 그렇다고 뜨거워지다니……. 차가워야 하는 건지, 뜨거워야 하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되돌릴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 2017. 2. 19.
가와바타 야스나리 『서정가抒情歌』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천상병 옮김* 『서정가抒情歌』 Ⅰ 죽은 사람을 향해 말을 건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 지녔던 모습으로 살아있는 줄로 안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식물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과의 유사점을 느끼는 것이 모든 서정시(抒情詩)의 영원한 제목이다―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마저도 잃어버렸고, 그뒤에 계속되는 구절도 모르고 이 말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식물이란 다만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만이 그 뜻인지, 보다 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는지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불교의 여러 경문(經文)을 비길 데 없이 귀중한 서정시라고 생각하는 요즈음의 저는, 지금 이렇게 해서 고인(故人)이 된 당.. 2016.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