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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6

나무의 기억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주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내가 떠나면 세상은 어떻게 되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떠나도 저 나무는 당연하다는 듯 저기 저렇게 서 있겠지.' 그럴 때 나는 나무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나무는 생각할 것이다. '한때 그가 이 길을 다녔지. 그의 잠깐을 영원처럼 여겼지.' 나무는 다시 다른 사람이 오가는 걸 보면서 곧 나를 잊을 것이다. 잊진 않을까? 사람은 무엇이든 금세 잊거나 오래 기억하거나 하지만 나무는 기억할 것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을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가령 저 밤나무 같으면 어떻게 적어도 150년 혹은 수백 년을 살까? 당연히 할 일이 있겠지? 할 일도 없는데 태어나고 살.. 2024. 1. 9.
새의 뼈 몇 개 달린 블루베리를 직박구리에게 빼앗기고 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어설픈 방조망을 설치했더니 영리한 그 녀석들이 그 아래로 기어들어가 새로 익은 열매들을 또 실컷 따먹고 이번에는 그 방조망을 헤치고 나오질 못해 기진맥진할 때까지 퍼드덕거리다가 지쳐 쓰러진 걸 보게 되었다. 직박구리들은 블루베리뿐만 아니라 벗지, 살구, 앵두, 대추, 보리수 열매... 달착지근한 건 뭐든 남겨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심은 나무 열매는 내 계산으로는 내 것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내 계산만으로 일방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 않겠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 그 녀석이 지쳐 쓰러졌거나 말거나 그냥 둘 수는 없으므로 일단 살려 놓고 보자 싶어서 방조망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더니 그럴 기력은 남아 있었던지 제.. 2023. 12. 25.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두 번째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두 번째 THE ILLUSTRATED BOOK OF SAYINGS: Curious Expressions from Around the World 세상에서 하나뿐인 기발하고 재미있는 표현들 루시드폴 옮김, 시공사 2017 우리 속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까마귀가 날아가느라 배가 떨어진 걸까요? 배가 떨어지는 통에 까마귀가 날아가버린 걸까요? 이건 얼핏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일지라도 애써 관련지으려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까마귀가 날아간 일과 배가 떨어진 일이 늘 연관되어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아무 상관없이, 그저 별개로 일어난 사건이었는지도 모르는걸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상상이 쉽게 멈출 리는 없겠죠. .. 2023. 12. 10.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An Illustrated Compendium of Untranslatable Words from Around The World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루시드폴 옮김, 시공사 2016 몽가타(MÅNGATA)는 물결 위로 길처럼 뜬 달빛이라는 뜻의 스웨덴어 명사란다(이 단어를 보면서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우리말 '윤슬'이 생각났다). 사마르(SAMAR)는 아랍어 명사로 해가 진 뒤, 잠도 잊고 밤늦도록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히라에스(HIRAETH)는 웨일스어 명사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 과거 속으로 사라진 곳에 대한 향수, 혹은 가 보지 못한 곳에 대.. 2023. 12. 9.
해 뜨는 시간의 인사와 기도 모든 것은 질량 중심 둘레를 돈다. 태양 역시 다른 별들과 함께 은하수 중심 주위를 공전한다. 태양이 한 번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천문학적 1년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속 82만 8,00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여도 은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지구 시간으로 약 2억 3천만 년이나 걸린다. 일전에《우아한 우주》(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라는 책에서 이 글('전형적인 별, 태양')을 읽었다. 우리 세상의 저 태양이 새삼 고마웠다. 시속 82만 8,000킬로미터! 그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태양이 "난 하도 많이 돌아서 이제 이 짓이 싫어!" 하고 딴 곳으로 달아나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태양이 은하 둘레를 딱 한 바퀴만 도는 데 2억 3천만 년이나 걸린다니.. 2023. 12. 5.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우아한 우주》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우아한 우주》 EATING THE SUN : Small Musings on a Vast Universe 심채경 옮김, 프시케의숲 2022 바쁘게 혹은 무심코 살아간다면 '우주'라고 해봤자 별것 아닌데─우주를 잘 몰라서 곤혹스러운 건 물리학, 지구과학 같은 과목 시험을 볼 학생 말고 또 있을까?─ 그 우주에 대한 글들을 써놓은 책이다. 어떻게? 이렇게, '신비롭게' '자세하게' '흥미롭게' '시적으로'. 이런 책을 보면, 나는 다시 책을 낼 기회가 찾아오면 이번에야말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정리하고 결정해서 독자들의 마음에 들도록 할 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책 때문에─내가 책을 내기보다 우선 읽어야 할 책이 자꾸 나타나서─내가 책 내는 일을 시도할 시간이 남지 않을 것.. 2023.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