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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5

여자 : 부정한, 잊을 수 없는, 구원의 우리들은 성스러운 땅에 발을 디뎠다. 선창가에 서서 기다리던 수사들은 손님 가운데 남자 옷을 입은 여자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찾으려고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하나씩 능숙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성산이 성모에게 봉헌된 이후로 천 년 동안 어떤 여자도 이곳에 발을 디디거나, 여자의 숨결이 공기를 더럽히거나, 심지어는 양이나 염소나, 닭이나, 고양이 따위 짐승의 암컷들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기에는 오직 남성의 숨결만 섞였다.(267)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친구 앙겔레스와 함께 배를 타고 아토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조차 불경할까? 성모는 여자가 아니었나? 나는 성모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니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지조차 모른다.그러므로 "여자의 숨결이 공기를 더럽히.. 2024. 8. 3.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상)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2021       많은 책들이 오랫동안 남아 읽히는 것 같아도 곧장 쓰레기가 되고 사라지는 책은 그 몇십 몇백 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웬만한 책은 다 그렇지만 특히 자서전은 대부분 '거의 바로' 쓰레기가 되는 것 같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군사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교사가 되었는데, 학교에서는 자료실 관리, 도서실 관리, 서무와 경리(그때는 행정실이 없었지) 등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들은 모두 나에게 맡겼다. 덕분에 나는 일요일도 없이 학교에 살다시피 했다.책은 좋은 것이어서 어느 일요일 오전, 오늘은 도서실 정리나 해볼까 싶어 이 책 저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이승만 대통령 자서전(평전이었던가?)을 발견했다. 표지를 넘기자.. 2024. 7. 30.
여자들에 대한 또 다른 욕망이 놓아주지 않아서 왕관을 벗어 버리고 이곳에 숨어 수도자 생활을 하려던 열망을 지녔던 비극의 황제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건설했다는 유명한 대수도원 라브라스를 어서 보고 싶어서 우리들은 날이 밝자마자 길을 떠났다. 여자들에 대한 또 다른 욕망이 놓아주지 않아서 황제는 속세를 떠날 날을 자꾸만 뒤로 미루고 다시 미루면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결국 가장 신임했던 친구가 칼을 들고 찾아와서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럴 수가 있나...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 》(나의 벗 시인─아토스 산)에 나온 이야기다. 니키포로스 포카스 황제가 아직 젊었던가? 그랬다면, 좀 더 살아보고 나중에 결정해도 좋았을 일을... 그렇게 미련을 둘 일도 아니었건만... 혹 모르는 일이긴 하지. 다 늙어빠져서도 성.. 2024. 7. 24.
사람 구경 '그들은 남들을 보고 또한 자신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서둘러 성당으로 갔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이탈리아')에서 이 문장을 봤다.요즘 내가 밖에 나갈 때의 이유 중 반은 사람 구경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파트에서는 일단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 내 호기심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가에 미친다. 하다못해 편의점에 다녀올 때도 그렇다. 누구를 만나도 만난다.'만난다'? 구경한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리고 그게 재미있다. 그 재미가 괜찮은 것이었는데 저 문장을 보고는 나 자신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물론 그들도 나를 슬쩍 쳐다보며 '저렇게 허접한 노인도 여기 사는구나' 하겠지만) 일방적·이기적으로 '사람구경'에 몰입한다는 걸 깨닫게 .. 2024. 7. 23.
그 시절 그 시절에는 세월이 느릿느릿 무료하게 흘러갔다. 사람들은 신문을 읽지 않았고, 라디오와 전화와 영화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으며, 삶은 말없이 진지하게 띄엄띄엄 이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저마다 폐쇄된 세계를 이루었고, 집들은 모두 빗장을 걸어 잠가 두었다. 집은 어른들은 날마다 늙어 갔다. 그들은 남들이 들을까 봐 조용조용 얘기하며 돌아다녔고, 남몰래 말다툼을 하며, 소리 없이 병들어 죽었다. 그러면 시체를 내오려고 문이 열렸으며, 네 벽이 잠깐 동안 비밀을 드러냈다. 그러나 문은 곧 다시 닫혔고, 삶은 다시금 소리 없이 이어졌다.  "영혼의 자서전"(Report to Greco, 니코스 카잔차키스 ㊤)의 그 시절. 지나간 날은 어쩔 수 없다. 그 시절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에도 있었고, 세상 그 어디.. 2024.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