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일 살아 있었고, 이렇게 하루가 가고 있다.
이런 삶이 괜찮은 것일까.
하루에 몇 번씩 포털 사이트를 열어서 세상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세상을 보며 생각하고 느낀다. 세상을 보는 일이 내다보기에서 들여다보기로 바뀌어 이렇게도 편리하고 쉬워졌다.
이젠 굳이 세상 내다보기를 하겠다면 바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웃고 하는 연예인들을 나는 잘 알고, 그들은 나를 모른다. 트럼프 같은 유명인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그들을 모른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내게 물을 일도 없고 누군가 내게 그걸 물을 리도 없다. 내가 그들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다. 종일 그들에 대한 일을 알려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데려와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는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가 돌아가는 스크린은 우리가 거의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있는 디지털 화면으로 바뀌었다. 독일어의 '면 Schirm'이라는 단어는 본래 보호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화면은 현실을 이미지 속으로 잡아 둔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현실로부터 차단한다. 우리는 이 현실을 거의 유일하게 디지털 화면을 통해 인식한다. 이 현실은 화면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은 스마트폰에서 너무 축소되어 현실의 인상이 더 이상 충격의 순간을 포함하지 않는다. 충격은 '좋아요'로 대체된다.
한병철의 책 《서사의 위기》에 이 문장이 있다(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3, 95).
철학자의 눈으로 관찰한 인간생활의 개요는 그렇다.
나는 익명의 몇몇 지인에게 '좋아요'의 체면치례는 하려고 애를 쓴다. 어제는 두통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얼른 나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나의 자리로 돌아와서 무엇을 했나? 나는 또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잘 아는 연예인의 사진을 발견했다. 광고를 위한 정사진(靜寫眞)이다.
그 사진은 그제도 어제도 같았다. '이 사람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나는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의아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활발하게 살아가는 듯한 그 연예인이 거기에 매일 그렇게 있는 것은 쓸쓸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느낀 쓸쓸함도 '좋아요'일까?
그 쓸쓸함은 결국 나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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