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파트에는 며칠 전까지는 벚꽃과 목련이 지천이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꽃들이 시새워 피고 있다.
나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냥 좋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했지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이름 같은 걸 알아보는 건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쓸데없는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올해는 뒤늦게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게 무슨 꽃이지? 따먹으면 죽는 건 아니겠지?'
'아, 핸드폰을 갖다 대면 이름을 알려주잖아!'
어제 오랜만에 이 나무가 있는 곳에 렌즈를 대어봤더니 AI가 시험 단계라서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 아래 '요상한' 이름이 떴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그 이름은 잊고 말았는데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이름이었다.
어제는 날씨가 흐려서 제대로 비치지 않았는가 싶어서 오늘은 작정하고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것 봐! 이게 영산홍이라네? 영산홍이 만발했다네?
뭐 이런 수가 있나!
내가 꽃에 대해서는 무지렁이라고 속을 줄 아나 싶어서 자리를 옮겨 다시 대어 봤더니 이번엔 또 명자꽃이라고 했다.
누굴 놀리나 싶긴 해도 이게 맞을 것 같았다. 우선 기분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저 예쁘게 핀 꽃의 생김새를 블로그 "봄비 온 뒤 풀빛처럼"에서 봄만 되면 본 것이 이미 여러 해이기 때문이었다. 느낌도 그럴 것 같았다.
확신 같은 걸 가지고 자리를 옮겨 대어 봤다. 이럴 수가 있나! 이번엔 이름은 대지 않고 그냥 '무성한 초록잎 사이로 붉은빛 꽃이 피어 있는 자주 받침꽃 관목의 모습'이라네?
내가 뭔가를 놓쳤나 싶어서 아래위로 다 살펴봐도 결국 '자주 받침꽃' 외에 다른 이름은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긴 하지만 관목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게다가 자주 받침꽃이라니...
또 자리를 옮겼는데 세상에, 이번엔 보리수라고 했다.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붉은 열매가 맺혀 있는 보리수나무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럴듯한 설명이었지만 아마도 저 붉은 꽃을 열매로 인식한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다.
이럴 경우 찍기가 필요하다는 걸 학교 다닐 때 많이 배웠다. 그래서 ① 요상한 이름, ② 영산홍, ③ 명자꽃, ④ 자주 받침꽃, ⑤ 보리수 중에서 명자꽃을 찍기로 했는데, 이에 추가로 확률 게임을 적용해 보기로 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자꾸 대어 봤더니 역시 '명자꽃'이 자주 나왔다.
나는 이름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다. 나무나 꽃, 풀, 사람 모두 그렇다(그 대신 이름을 알게 되면 특별한 정을 느끼는 건 분명하다).
뭐든 많이 암기하자면 골치가 아플 것 같아서 두려워진다.
아내는 서울을 중심으로 광역 전철노선도를 다 암기한다. 치매 얘기를 하며 나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은근히 종용하는데, 나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한다. 내가 외우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그래서 주입식 암기교육을 혐오한다는 걸 그녀는 아직 잘 모른다.
학교 근무할 땐 아이들 이름을 외지 못해 곤혹스러웠다.
물론 새 학기가 되면 출석부를 만들고 6,70명 이름을 암기해서 1번부터 차례로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는 척지만 그건 다 '가짜'여서 한 달쯤은 이름과 얼굴이 헛갈려서 고역을 치렀다.
봄에 아이들이 교정에 핀 꽃을 보고 이름을 물어서 애기똥풀, 노루궁둥이 같은 특이한 이름이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해 주었다가 나중에 정정해 주느라고 애를 먹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오늘 저녁, 에이아이가 저 명자꽃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울타리를 보고 신나는 대로 가르쳐 주고 심지어 영산홍이라고도 한 데 대해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영산홍도 구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세상을 지배하겠나 싶은 것이다. 당장은 아닌 것이다. 나 같은 무지렁이도 아는 영산홍도 하나 모르다니 원, 주제에 무슨 AI 씩이나 된다고......
어디서 만나면 "이게 그래 영산홍이야, 이 사람아!" 하려고 영산홍 사진도 두 장 찍었다. 녀석을 낯 뜨겁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또 앞으로는 무슨 화초에 핸드폰을 들이대는 짓은 AI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잠정적으로 유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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