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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도 이렇게 써 봤으면

by 답설재 2026. 4. 19.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장편소설(掌編小說, 손바닥소설)도 여러 편 썼다. 읽고 나면 아무리 짧아도 등장인물들을 만나고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요즘 사람들은 내 글처럼 조금만 길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 글"이라 하고 얼른 다른 사이트로 가버리곤 해서 좀 있던 독자들마저 하나둘 다 떨어져 나가 이제 몇 남지도 않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길게 써서 언제고 원고를 팔아먹게 되면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황당하고 음흉한 계획을 가진 것도 아닌, 그저 늙고 병든 평범한 블로거일 뿐이고, 나도 짧게 써보자 생각해도 글 쓰는 걸 배운 적도 없어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쓰는데 써다 보면 긴 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자니 어쩌다가 한 편 정도는 길이도 그만하고 처음과 중간, 끝맺음이 그럴듯해서 어느 독자가 '어? 괜찮네!' 생각하고 "이 글 우스웠다" "답설재 글도 재미있을 때도 있네?"라는 댓글이라도 하나 남겨주면 나름 히트를 치게 되는 것인데, '이번에는' 하고 마음먹고 썼지만 맨 첫 독자가 읽고 내 의도와는 동떨어진, 점잖은 댓글을 심각한 투로 적어놓고 가면 다른 독자는 대개 그 댓글을 참고로 해서 적어주기 쉬우니, 딴에는 재미있게 쓴다고 썼지만 싹도 피워보지 못한 실패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밀레니엄'이란 말을 자주 듣던 2000년 무렵, "현대문학"지에서 21세기에 이름을 드날릴 것 같은 작가를 적어 보내달라는 엽서를 첨부한 적이 있는데 나도 한번 그 엽서를 보내보고 싶어서 당시 "최순덕 성령충만기" 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있던 이기호 작가를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후 작품도 많이 발표하고 상도 많이 받아서 지금은 중견작가가 되어 있고, 원주 출신이지만 광주대학교 교수를 지내고 있다.

 

이기호 작가는 "현대문학"지에 매달 '미성년未成年 가족'이란 제목으로 짧은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훈훈한 가족 이야기여서 재미있게 읽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아니지만 나도 이런 글 좀 써봤으면 싶어 한다.

가령 이렇다(2024년 7월호). 아버지가 아프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가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

원주까지 다섯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해 가면서 내 머릿속에선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반복해서 떠올랐는데, 그건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훨씬 젊은 아버지가 난생처음 당신 명의의 차를 구입해 집으로 몰고 온 모습이었다. 전자식 계기판이 달린 은색 르망. 그게 아버지의 첫차였다. 아버지는 당시 고3, 고1인 형과 나, 그리고 어머니를 태운 채 아주 느린 속도로 동네와 인근 초등학교 근처를 돌았는데, 초보 운전이다 보니 잔뜩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르망의 속도는 30킬로미터를 채 넘지 않았고, 그래서 뒤따라오던 차들이 신경질적으로 클랙션을 울려대거나 빠른 속도로 추월해 나갔다. 그래도 아버지는 계속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 차 유리창으로 태양의 잔광이 튕겨 나가던 4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이거 너희들 학교 데려다주려고 산 차야."

아버지는 약간 우쭐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형이나 나나 별다른 대꾸는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싫었고, 자식들을 옥죄고 감시한다고만 생각했다(실제로 형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르망을 타고 등교하지 않았다). 쳇. 그래서 무리하게 할부로 차까지 구입하신 거구나.

그런 형과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정말 뿌듯하신 모양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귓불. 그 귓불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내 등하교를 책임지셨다.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터덜터덜 교문 밖으로 걸어 나오면 그 은색 르망이 가로등 아래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늘 성실했던 아버지처럼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나는 그 차를 타기 싫어서 몇 번 말없이 야간 자율학습을 '째고' 도망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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