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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 근 / 병 속에 담긴 편지

by 답설재 2026. 4. 2.

밤이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길들은 모두 샅샅이 드러나고 세상의 말들은 모두 자명해졌습니다 자명해졌으나 점점 빛이 바래가고 그늘이란 그늘은 모두 조금씩 제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우리의 음지식물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좋아했지요 드디어 꿈꾸던 세상이 왔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곧 사람들은 당국을 지지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잃었어요 어떤 어둠도 거느리지 않은 사람들은 점점 밝아졌지요 밝아지다 희미해졌어요 대지도 나라도 희미해졌지요 계속되는 대낮이 고통일 줄은 그때는 몰랐던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을 느끼는 일도 슬피 우는 일마저도 곧 검열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그곳의 괴물들은 무사한지요 밤의 골목들을 어슬렁거리던 괴물들은 이제 이곳에선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따금 숨어들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에 쓰러져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괴물들이 한두 마리 발견되곤 했지만 벌써 그것도 옛날 이야기지요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날로 처형되었다는 소문만 떠돌다 금세 흩어질 뿐이었습니다 거리는 다시 깨끗해지고 형체가 불분명한 것들이 모두 치워졌지만 거리를 이루던 모서리들은 햇빛 속에서 밝아지고 희미해지고 제 날카로운 경계를 아주 버려버리더군요 사람들도 사물들도 병약하거나 죽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병도 죽음도 괴물들 탓이었다고 당국은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약하나마 밤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우선 조금씩 모호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국의 눈을 피해 우리는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는 황급히 세상의 밝음 속으로 숨어들곤 하지요 그럴 때마다 각자의 몸에 조금씩 명암이 생겨나는 걸 목격했어요 명암을 낯설어하던 우리들은 어느새 더 자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희미한 사람들이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찾아가고 있어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효과가 빠른 편에 속하지요 더디고 더디지만 우리를 품어줄 어둠이 이 나라 곳곳에 한 뼘씩이라도 생겨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에 우리는 무척 고무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괴물들을 좀 보내주십시오 흐물거리는 놈으로 한 서너 마리쯤이라면 밝음을 틈타 국경의 검문은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칙칙한 담벼락도 몇 장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네요 부디 밤하늘의 별들이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기는 합니다 희미한 나라의 희미한 주민들은 희미하게 점점 더 희미한 아기를 낳고 통증도 없이 오늘도 희미한 웃음을 그것이 웃음인 줄도 모르고 웃고만 있습니다 당신의 괴물이 하루라도 빨리 도착한다면 희미해지다 못해 아주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곳의 싱싱한 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괴물을, 괴물을, 기다리고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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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근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1998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15년 전, 2011년 7월『現代文學』에서 이 시를 읽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은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시인은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싶었다.

 

나 같은 숙맥도 나름대로 앞날을 예측하며 지내고 있었다.

열강들은 두렵기도 하고 미덥기도 했고, 세상은 질서 속에 나아가고 있었다.

나쁜 나라는 UN이 나서서 훈계하고 제재를 가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지금 생각하기로 그랬다는 얘기다.

 

그렇게 2026년이 되었다.

오늘 아침, 나는 이란이 정말로 휴전을 제안했는지 뉴스를 보면서도 알 수 없었다.

트럼프는 오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뉴스를 봐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일 일은 모르겠고, 내년은 어떤 세상일지 전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