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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채상우 / 망茫

by 답설재 2026. 3. 11.

입춘 나흘 전 이른 오후 일주일 만에 산책을 나선다 단풍나무들 몇 겨울 햇살 트더진 데마다 쨍하니 낑겨 있다 그 곁을 걸어가는데 문득 무언가가 반짝인다 뒤돌아보니 두어 걸음 저편에 매미가 있다 애매미다 푸른 기도 여전하고 날개도 온전하다 너도 이젠 속이 텅 비었구나 맥락 없이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왜였을까 모르겠다 중얼거리면서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매미는 반짝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좀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가 괜스레 애를 써봐도 매미는 꼼짝없이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죽은 채 버티고 있다 매미가 아니었던가 그럼 저기 단풍나무 아름을 떠나지 못한 시과翅果들 중 하나였을까 아니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잔돌들 중 하나였을까 무엇이었을까 아까 반짝였던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마른 이끼들 사이로 소소하게 돋아나고 있는 이끼들이었을까 세다 못해 누레진 봉두난발 맥문동 잎줄기들이었을까 어쩌면 어디 숨어 있을 맥문동 까만 씨앗이 반짝였을지도 모를 일 모르겠다 맥문동 씨앗이 저기 어디쯤 있기는 있는 걸까 맥문동 씨앗은 내내 까맣기만 할까 반백이 지났는데 모르는 것투성이다 아는 건 겨우 몇 남지 않은 이름들이 전부다 지금 우리에게 도착한 모든 별빛은 사멸한 빛이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친구가 쓴 이런 앳된 문장만 맴돌 뿐 실은 친구가 쓴 건지 어디서 읽은 건지 그것도 확실치가 않다 모르겠다 그저 텅텅 비어가고 있다 그런데 비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공중은 정말 비어 있는 걸까 그나저나 아까 반짝였던 그 빛은 어디를 향해 날아갔을까 지금은 우주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을까 외로울까 아직은 외로울까 모르겠다 전부 다 모르겠다 다만 일부러 기억하지 않아도 어떤 일은 남김없이 기억난다 하릴없이 중얼중얼 중얼중얼 다시 걸으려는데 뭔가가 반짝인다 또 반짝인다 내 뒤에서 뭔가가 진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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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우  1973년 경북 영주 출생. 2003년 『시작』 등단. 시집 『멜랑콜리』 『리튬』 『필』.

 

 

 

 

 

 

출처 : 『현대문학』 2026년 2월호.

 

 

모든 것은 빛난다는 주장이 있다. 허사가 아닌 것 같다.

어디 먼 곳에서 이곳을 보는 눈길에는 이곳이 빛나는 곳일 수도 있다. 그러면 저 시냇물처럼, 저 시냇물을 따라 여기저기 걸어가던 그 사람들도 그렇게 빛났을지도 모르겠다.